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충호 편집인
이충호 편집인

키케로의 에세이 《노년에 관하여》을 읽다보면 송골송골 소름이 쫙 돋아나며 몸서리치게 만드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적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처형을 당하러 카르타고로 돌아간 로마인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Marcus Atilius Regulus, 기원전 307-250)다. 

지중해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을 치르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전력이 예상과 달리 약세라는 판단을 내린 로마군은 시칠리아 남부 해안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한 뒤 아프리카 본토로 진격해 수도 카르타고 동쪽에 진을 치며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봄 카르타고 군대는 코끼리 떼를 앞세우고 로마군을 공격해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최고사령관인 레굴루스는 포로 신세가 되었다. 

이참에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카르타고는 평화협상을 위한 사절로 레굴루스를 로마로 보낸다. 원로원을 설득해 포로교환과 평화협정을 성사시키라는 것이 레굴루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레굴루스는 로마로 향하기 전, 적장에게 임무를 마치고 카르타고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가 왜 적에게 그런 약속을 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로마에 온 레굴루스는 포로교환과 평화협정에 관한 카르타고의 의향을 전하는 대신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정반대의 연설을 한다. 카르타고가 평화협정을 원하는 것은 약점이 있기 때문이니 로마가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간청한 것이다. 결국 로마는 레굴루스의 호소를 받아들여 카르타고의 평화협정을 거부했고 레굴루스는 자신의 약속한 대로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그는 예상대로 잔인한 고문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조국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권하는 연설이,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확실하게 닥칠 줄 알면서도 적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카르타고로 돌아간 레굴루스의 행위가 그 후 로마인의 명예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그는 로마의 콘술(consul, 집정관)이었다. 공화정 로마 체제에서 왕과 같은 존재로서 민회에서 선출되어 원로원의 승인을 거쳐 추대된다. 왕이 종신제였던 것과 달리, 집정관의 임기는 1년이었다. 로마 공화정은 독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두 명의 집정관을 두었는데,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해당 정책은 시행되지 않았다. 집정관은 내정의 최고책임자이면서, 전시에는 사령관직을 맡았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은 법이다. 현재의 그리스 북서부와 알바니아 남부 지방에 걸쳐 있던 작은 도시국가 에페이로스의 군주였던 퓌르로스(기원전 319-272)가 로마와 전쟁 중 휴전협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퓌르로스는 로마의 협상 대표인 파브리키우스 루스키우스(Gaius Fabricius Luscinus)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이간책이었는지 그를 돈으로 회유도 해보고, 코끼리로 협박도 해보고, 철학 논쟁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자기 나라로 오면 고위직을 주겠다는 제안에도 담담하게 거절하는 파브리키우스에 감동한 퓌르로스는 포로로 잡혀 있던 로마군 병사들이 로마로 돌아가 농경신 사투른(Saturn)을 기념하는 사투르날리아 축제를 지낼 수 있도록 통 큰 아량을 베풀었다. 

그런데 모국에서 명절을 쇤 로마군 포로들은 모두 에페이로스의 포로수용소로 다시 돌아왔다. 그들에게는 적군의 삼엄한 감시보다도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조국 로마의 명령을 더욱 무섭게, 엄중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청년기 로마는 이렇게 위아래 할 것 없이 당당한 모습이었다.

헌신이란 결코 겉을 바르는 말에서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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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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