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봉사활동 하는 김광희 씨

“16년을 무용을 했는데, 이제야 조금 힘을 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하물며 삶에서 힘을 빼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평화롭고 즐거운 노년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일어난 교통사고는 죽음보다 더 깊은 고통이었다.

2016년 3월, 중국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국내 앙코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위에서 처참한 사고를 당한 것이다. 춤을 추는 그의 다리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난 너무 억울했어요!” 사고에 대한 그의 심경이다. 

김광희 씨

그는 춤꾼이다. 그에게 두 다리는 제2의 목숨이었다. 그런데 그 다리가 부서져버린 것이다. 1년 6개월의 험난하고 치열한 재활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는 1949년생이다. 춘천에서 태어나 한 번도 춘천을 떠난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고 춘천여고 재학 중에는 거문고로 전국대회를 휩쓸기도 했다. 이력으로만 보면 큰 어려움 없이 살아온 것 같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조그만 사무실의 급사로 들어가 일을 해야 했고 어렵게 겨우겨우 마련한 학비로 진학을 했다. 여고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강권에 의한 중매로 지금의 남편과 맞선을 보았고 3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그땐 너나없이 다 가난했어요. 또 다들 그렇게 사나보다 하며 살았지, 지금도 어머니 쌀독 긁던 소리가 들려요. 집에서 시집을 가라 그러니 갔고, 아이 낳고 살다 보니 어느새 늙은 거지….” 공무원인 남편은 성실했고 그 또한 열심히 살았다. 자녀들 출가시키고 생활에서나 심적인 면에서 조금 여유로워진 그는 쉰다섯이 되던 2003년, 우연히 동부노인복지관에서 ‘시니어예술단’ 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다시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춤을 춘 그에게 교통사고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재활 치료는 지옥 같았다. 그는 수시로 우울해졌고 자꾸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병간호를 도맡았던 딸은 그런 그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혹시 자살이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어머니를 돌보던 딸은 복지관 관계자들과 의논을 하게 되었고 때마침 춘천 MBC로부터 ‘나이야 가라’ 프로그램의 섭외 요청을 받고 있던 복지관 측에서는 그를 출연시키기로 했다. 그를 세상으로 끌어내기 위한 절박한 마음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세상으로의 발자국을 떼어놓게 된 것이다. 오디션에 합격한 후 그의 마음에는 작은 변화가 일었고 재활에 대한 의지도 솟아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한 계단, 다음 날은 두 계단…, 그렇게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이 고스란히 방송으로 나갔다.

“복지관 분들과 방송국 피디님이 나를 살린 거예요. 병원에서 휠체어에 앉아 어두워지는 창밖을 보면서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했거든. 방송에 나간 내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다른 환자분들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나도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거지.” 3개월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병원 생활은 1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간병인을 썼어요. 그러다 딸이 간병을 시작했고 그 후로는 남편이 했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마음이 우울해지면 막 짜증을 냈어요. 아주 많이. 그러면 남편은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 한참 있다 나올 때 보면 얼굴에 눈물자국이 그득하고 눈가가 벌개져서 나와. 그런 사람 없지. 항상 고맙고 또 미안하지. 남편이 코를 좀 심하게 골아요. 그래서 다른 환자들이 싫어해서 밖에 간이의자에서 쪽잠을 잤는데 뒤척이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이 많았어요. 어떤 남자가 그렇게 하겠어?”

지난해 5월 16일 전북 남원에서 열린 전국시니어춘향선발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사진 제공=김광희
지난해 5월 16일 전북 남원에서 열린 전국시니어춘향선발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 제공=김광희

길고 어두운 터널을 함께 지나온 시간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춤으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병원 있을 때, 크리스마스였는데 너무 쓸쓸하고 우울했어요. 그래서 같이 공연하던 친구들과 함께 위문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환자가 장단에 끌려 한 손을 움직이는 것을 봤어요. 그때의 그 벅찬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하겠어!” 이제 그는 춤뿐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배워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복지관 프로그램이 너무 좋아요. 별의별 게 다 있다니까. 집에서 그냥 세월만 보내지 말고 다들 나왔으면 좋겠어. 집에만 있으면 우울하잖아?” 그는 봉사를 통해 무한한 행복과 감사함을 얻는다고 했다. “암만 백세 시대라고 하지만 이제 70이면 끝이 보이는 나이지요. 젊은 날을 생각해 보면 후회가 돼. 내가 시간을 너무 헤프게 써버린 것 같아서. 그때는 한없이 젊을 줄 알았지. 난 안 늙을 줄 알았거든. 난 인생은 70부터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제 70이니까. 그동안 내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받았던 것들과 고마운 마음들을 이제는 돌려준다는 행복감과 감사함으로 봉사하면서 살아야지,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어요. 내 건강이 허락한다면 나는 나중에 아프리카 봉사도 꼭 해보고 싶어요. 그것이 미래를 살아갈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의 머릿속에는 딱따구리 두어 마리가 살고 있다고 한다. 한 번 시작되면 참기 힘든 두통과 온종일 쌀 한 가마니를 이고 있는 듯한 온몸의 통증이 그를 한순간도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에게 마구마구 화풀이를 하기도 한단다. 그러면 남편은 또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울고 들어오고…, 가끔은 되받아 치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은 그나마 견딜 수 있지만) 평생 안고 가야 할 통증을 오늘도 끌어안은 채 그는 웃고 있는 것이다.

희한한 게 춤을 출 때는 아픈 걸 모르겠어. 16년을 넘게 무대에 섰지만 설 때마다 긴장을 해요. 춤을 춘 지 10년이 지나서야 아, 이렇게 발을 떼는 것이구나! 했어요. 춤을 제대로 추려면 몸에서 힘을 빼야 하는데, 이제야 힘을 뺀다는 것이 뭔지 알 것 같아. 이제야 조금씩 힘이 빠지는 거야. 몸으로 하는 일도 그런데 하물며 삶에서 힘을 빼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어! 내가 가진 욕심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씩 내려놓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게 삶의 힘을 빼는 거지, 뭐.

우리는 단 한순간도 삶을 앞질러 가 살 수 없다. 다음 모퉁이에 어떤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지, 얼마나 큰 바윗덩어리가 머리 위를 덮칠지 알 수 없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그것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며 삶의 방식을 통째로 바꿔버릴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것인지 그대로 주저앉을 것인지는 오직 자신의 선택이겠으나 주변에 어떤 사람이 함께 서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누군가 아픔을 겪고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얼마나 기꺼이, 또 얼마나 따뜻하게 오랫동안 그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복지관 식구들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때만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온몸이 아프지만 춤을 출 수 있는 지금이 무한히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며칠 동안 귓전을 맴돌았다.

이경애 시민기자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