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의심은 사회진보의 출발이다. 신을 의심하며 계몽의 시대가 열렸으니, 신의 시대라서 구닥다리가 아니라 의심이 신을 구닥다리로 만들었다. 의심이 과학적 합리성으로 강화되자 세상은 눈부시게 명료해졌다. 

모든 변화의 출발은 의심하는 개인이었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원리는 같았다. 공동체적으로 의심한다? 의심하는 국가? 그런 건 없다. 의심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하기도 하다.

역으로 의심을 해보자. 의심하는 개인은 좋은데, 과연 그 의심이 온전히 개인의 것일 수가 있는가? 당신의 의심은 입력된 바 없이 순수하게 당신으로부터 비롯되었나? 마치 철학 수수께끼처럼 아리송하다. 

나는 직업상 전국의 농민들을 꽤 많이 알고 있다. 그중 각별한 사람들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농사를 짓고 있다. 그들의 농법은 유기농·친환경농·생태농·자연농·무투입농 등으로 불리는데,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자연·흙·생태계에 해를 덜 입히는 농사다. 

“내가 기계·비닐·제초제·화학비료·농약을 생각 없이 사용하면, 자연과 생명에 부담을 더하는 죄를 짓는 게 아닐까?” 그들의 의심은 이렇게 출발한다. 그렇다고 매일 아침마다 그런 의심을 주기도문처럼 반복하기야 하겠는가. 적어도 출발은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들 개개인의 의심과 각성에서 출발한 농업노동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당신은 나를 의심하리라. “아니, 친환경농업이 각광받고 값도 더 비싼데, 돈 벌려고 농사짓지 무슨 의심이고 각성이야?” 오! 당신의 합리적인 의심이 옳다. 농사는 깨우치려고 짓는 게 아니라,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다. 각성을 했든 말든 깊든 얕든, 결국 돈으로 환산되는 것이 농사다. 당신의 의심이 이겼다. 

여기서 잠시, 농민들의 실제 대화를 들어보자. “소비자들이 농장에 찾아와서 유기농이 왜 이리 깨끗하고 튼실하냐고 의심하더군.”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소비자들이 찾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려서 그렇다고 했지.” “저한테는 소비자들이 왜 유기농인데 벌레 먹은 데 하나 없냐고 의심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일부러 벌레를 잡아와서 올려 보여줬지요.” 

부연하자면, 소비자는 크고 모양 좋고 잘 빠진 농산물이 아니면 사지 않는다. 동시에 소비자는 잘 빠진 유기농산물은 유기농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니까 저 농민들이 눈물을 머금고 선별(대부분 버린다)하거나, 유기농에 허용된 비싼 미생물영양제를 투여해서 어렵사리 소비자에게 내놓으면, 이번에는 가짜 유기농일 것이라며 의심으로 대응한다. 뭘 어쩌란 말이냐?

이번엔 내가 당신의 의심을 의심할 차례다. 첫째, 당신의 의심이 순수한 당신 자신의 의심인지, 아니면 시장의 속설에 의한 의심이거나 당신이 아직 잘 몰라서 생긴 의심은 아닌지를 의심하기 바란다. 둘째, 당신은 의심이 공동체적 신뢰로 이어지는 의심인가를 의심하기 바란다. 의심이라고 아무 때나 능사는 아니다. 의심은 응원하고 협동하고 연대하는 공동체적 신뢰로 진화하는 불씨다. 때로는 의심으로 이길 수도 있겠으나 끝에는 뭐가 남을는지.

언제 어디서나 의심과 신뢰의 문제는 항상 어렵다. 예컨대, 협동조합도시 춘천이라던가? 그러면 의심과 신뢰 속에서 당신의 협동조합은 안녕하신가? 당신의 의심은 적절하고 신뢰는 충분한가? 협동조합이야 얼굴 맞대고 소통이라도 할 수 있다. 오늘도 농민은 당신의 과한 의심과 각박한 신뢰 때문에, 매우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만은 알아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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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과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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