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강원대 행정심리학부 교수)
김대건 (강원대 행정심리학부 교수)

그루터기 나무와 관련된 동화가 있다. 나무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루터기로 남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내용이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고, 누군가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재료가 되어 주던 나무가 그루터기가 된 상태에서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앉아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준다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헌신과 사랑 이야기이다. 

나무가 잘려 나가고 땅에 박힌 뿌리만 남은 것이 그루터기이다. 동화가 아닌 다소 따분한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루터기는 죽은 것일까? 살아 있는 것일까? 나무를 포함하여 어떤 동식물도 몇 년 동안 굶주리면 견딜 수가 없다. 죽게 마련이다.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나무는 죽는다. 그러므로 그루터기는 세월에 의해 점차 부식되어 해체되어 가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그루터기는 살아있을 수 있다. 엽록소나 살아 있는 나무줄기에 저장된 영양분을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그루터기가 있다. 

그 답은 이렇다. 뿌리를 통해 이웃 나무들의 지원을 받는 것이다. 나무 생태학자들에 의하면, 숲에 있는 나무는 나무 간의 교류를 통해 뿌리 끝을 서로 감싸 안고 영양 교환을 돕는 균류를 통해 영양분을 주고받거나, 직접 서로의 뿌리가 뒤엉켜 하나의 뿌리처럼 결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숲이라는 공동체에 있는 나무는 그루터기가 되더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숲의 세계는 슈퍼 유기체이다. 보이지 않는 땅 아래에서는 뿌리들이 서로 소통하고 얽히고설킨 긴밀한 뿌리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없는 줄기와 뿌리가 무한 증식하고 무한한 생명력을 지니며 수평적이고 탈 중심적인 세계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게 바로 들뢰즈가 말한 리좀(무한한 잠재성 상태)의 세계일 것이다.

나무도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면 왜 그런 사회적 존재가 되었을까? 자신의 영양분을 다른 동료들과, 나아가 적이 될 수도 있는 다른 개체들과 나누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함께 하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는 비와 바람을 이겨 낼 수 없고 필요한 일정한 기후를 조성할 수 없다. 모든 나무가 자신만 생각한다면 오랫동안 수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옆에 있던 나무가 없어져 홀로 남은 나무는 생존하는데 필요한 환경을 만들지 못한다. 반면에 생태적인 숲을 이루면 상당량의 물을 저장할 수 있고, 습기를 유지할 수 있으며 더위와 추위를 견딜 수가 있다. 나무가 숲이라는 생태적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다. 살아있는 그루터기는 숲 공동체에서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주위가 다 파헤쳐지고 그루터기가 홀로 남아 있는 곳이거나, 그루터기 주위로 인공적인 숲이 만들어진 곳에서는 살아 있는 그루터기를 발견하기 어렵다.

관계의 단절과 사회의 분절 현상이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주간 경향(2019년 8월 19일자)에 의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가 회원국들의 각종 사회적 지표들을 취합해 비교 공개하는 ‘더 나은 삶 지수’를 보면 한국은 공동체 부문에서 줄곧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고, “구성원 각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원망이 갖춰져 있는지에 대한 조사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40개국 중 40위를 수년째 지키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21.6%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이 되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이 전혀 없다”고 답하고 있으며, “삶의 만족도가 10점 만점 중 5.9점으로 33위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IMF 사태 이후 홀로 살아남기를 위한 경쟁, 악마의 성질을 가진 자본을 신봉한 우리 사회 현재의 모습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강원도뿐만 아니라 춘천시는 최근 마을공동체 재형성과 복원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더 좋은 공동체와 주민 간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주민자치위원회를 주민자치회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사회적인 본성을 되찾고 인간 간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제도적 노력이라 볼 수 있다. 1인 가구와 혼밥, 혼술의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사람과의 ‘관계’와 ‘사회’속에서의 공동체의 복원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무도 따로 또 같이 사는 방법을 알진데, 본성적으로 관계 지향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이 숲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나무들의 현명한 지혜를 확인하고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 자체가 참으로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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