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 (강원영상위원회 사무국장)
김성태 (강원영상위원회 사무국장)

커다란 트렁크 한 개, 배낭 하나 그리고 낡은 카메라를 든 불안한 동양의 이방인이 지구 반 바퀴를 날아 책 속에서만 보았던 그리고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나라에 도착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꿈을 위해 조국에 남겨둔 조금 편안한 삶을 팽개치고 떠난 호기 당당한 유학생이 아니었다. 가방 세 개에 의지해 두려움과 후회로 공항에 발이 묶인 불쌍한 유학생일 뿐이었다. 사실 나는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 나 자신에게 수없이 반복하고 후회도 했다. 하지만 나의 역사는 나의 손과 발로 써야 한다는 작은 자존심이 나를 폴란드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나는 두려움과 후회의 눈으로 1997년 늦봄의 바르샤바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르샤바 아니 폴란드는 회색이었다. 

당시 폴란드는 사회주의 체제가 50년 넘게 지속되고 있어서 사람들의 삶 속에 그 영향이 깊이 뿌리를 내린 상태여서 자유민주주의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나라였다. 폴란드에서 생활하며 느낀 폴란드 사회주의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단연코 회색이었다. 그리고 당시 내가 느꼈던 문화적 이질감은 가벼운 배낭여행으로 다녀온 서유럽과는 너무나 달라서 무식한 용기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동유럽의 나라 폴란드 역사는 먼 동쪽나라인 우리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와 많이 닮아 있었다. 

폴란드는 123년 동안 지도상에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서러움을 참아야 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세국가로 폴란드는 분할 통치 되는 굴욕을 견뎌야 했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연합군에 의해 독립국가로 재수립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폴란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 독일군에게 학살된 폴란드 유대인은 310만 명, 비유대인은 300만 명에 이른다. 너무나 참혹했던 전쟁의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아픔으로 폴란드 국민들 가슴속 깊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또한 같은 시기에 같은 고통을 겪었던 민족이기에 폴란드의 상처와 고통을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당시 소련의 도움을 받은 폴란드 정부는 소련의 정치 체제를 본떠 공산주의 체제를 이루었다. 그리고 폴란드는 50년 이상 공산주의 그늘 속에 있었고 처음 바르샤바에 도착한 나는 도시의 풍경과 색으로 그 공산주의 그늘을 느낄 수가 있었다. 폴란드 유학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던 날 부모님은 단순히 폴란드가 공산국가라는 이유만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의 결심을 말리시기도 했었다. 

다행히도 폴란드는 1980년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운동을 시작으로 1990년에 대통령 직접선거로 민주화를 이루어냈고 주변국으로까지 그 영향을 미칠 만큼 자유민주주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그들의 처절한 저항정신은 문화와 삶 속에 스며들었고 이방인인 나에게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바르샤바 건물의 모습과 색깔이 그리고 나를 외면하며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냄새에서 나는 기쁨과 절망을 느꼈다. 그 후 마주하게 된 폴란드 영화는 그들이 만들어간 역사의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내가 폴란드 영화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가 비슷하게 경험한 역사로 인해 가지게 된 한(恨) 때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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