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라언어임상연구소 언어치료사 김두라

살면서 보통의 사람들은 가끔 생각할지도 모른다.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만의 고유한 달란트, 혹은 천부적 사명감이 그들을 끌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것은 분명한데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전화를 했을 때 할 말이 없다고, 그럴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다른 사람을 추천해 주겠노라던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들 거절해서 자신이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자신은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어찌하느냐 걱정부터 하는 그는 언어치료사라는 낯선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인터뷰 일정을 잡아놓고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기호. 곧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목구멍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나타내는 소리를 가리킨다’라고 되어 있었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의 음절을 쏟아내면서도 ‘말’의 정확한 뜻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었다.

김두라 소장
김두라 소장

말은 수천, 수만의 신경과 호흡기관, 발성기관, 그리고 조음기관이 협응을 이루어 내는 소리라고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오묘한 구조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그는 자그맣고 귀여운 여인이었다. 미소가 곱고 목소리가 차분했다. 어떻게 언어치료사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물었다. 

 

여고시절의 대부분을 누워서 보냈어요. 신장염에 이어 늑막염으로 고3인데 학교도 못 가고 폐에 고인 물이 다 마르도록 안정을 취해야 했지요. 병상에서 문득 생각했어요. ‘장애인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건강하지 못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특히 언어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유독 마음이 갔어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농아인을 위한 봉사를 하려 했는데 수화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만 해도 공부 방법이 막연했다고 한다. “그 당시엔 서점에 가서 수화에 관련된 책을 찾으면 “수학이요?” 하고 되묻던 시절이었어요. 그쪽으로는 사회적 관심이 거의 없던 때였죠.” 그러던 차에 그가 다니던 영락교회 도서관에서 농아인 신학대학생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영락농아인교회에서 수화를 배웠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한국구화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보청기를 이용해 잔존청력을 활용해서 발성기관을 훈련하는 구화교육을 접하게 되었고, 개별발성지도, 청능훈련, 말하기수업 등의 경험을 쌓았다. 

그 후, 전문서적으로 독학을 하면서 특수교사 검정고시를 준비했으나 검정고시 제도가 폐지되면서 대학원 특수교육학과에 진학해 특수교사의 길을 선택했으나 다시 바뀐 법령은 학부에서 전공을 해야만 자격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학원 동기의 조언으로 언어치료, 언어병리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일본과 덴마크,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특수학교와 언어치료 현장을 견학하면서 가슴 속에 언어치료실 개설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앳된 고등학생이던 그는 장애인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건강과 가족 등 여러 가지 여건에 매여 거창한 계획보다는 항상 그들 가까이에 있는 비장애인으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1999년 나이 마흔에 준언어치료사 자격증과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춘천 최초로 사설 언어치료실을 개설하게 됐다. 그렇게 되기까지 남편의 도움도 컸다. “처음 만났을 당시 남편은 의예과 1학년이었는데 내가 가진 꿈에 대해 듣고 나서 재활의학 쪽으로 전공을 정했어요. 고마운 사람이죠.” 부끄러운 듯 웃었지만, 무척 행복해 보였다. 현재 그의 치료실은 남편의 재활의학과 부설기관으로서 같은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아름다운 꿈을 위해 함께 걸어가는 그들 부부의 모습은 충만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는 그동안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5권의 ‘재미있는 언어치료 시리즈’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 시리즈는 지금도 많은 독자들이 찾는 언어임상 분야의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그는 보건복지부가 시행하고 있는 1급 언어재활사 자격증 역시 취득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하는 그. 오직 한 길로만 묵묵히 걸어온 그는 올해 4월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았다. 언어임상가들을 위한 교재·교구 제작 및 교육, 질 높은 언어서비스 제공 및 장애인 인식 개선을 위한 활동, 재능기부와 사회 봉사활동 등으로 언어장애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언어치료에 헌신한 20년, 그 길고 외로운 시간 속에서 키워낸 열매였다. 축하의 인사에 그는 과분한 상이라고 했다. “‘아, 아-’만 하던 어린이가 또는 심한 말더듬으로 숨까지 막혀 힘들어하던 어린이나 어른이 편안한 발성과 발음으로 안정적인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지켜볼 때 저는 잔잔한 보람을 느낍니다. 언어치료실을 개설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장애 아동을 돌보는 일만으로도 힘들어하는 장애아 부모들이 경제적인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신문고에 글을 올렸는데, 국가서비스를 실행하여 부모의 부담을 대폭 줄이겠노라는 답이 왔고 얼마 되지 않아 바우처제도가 실행됐어요. 그때는 정말 너무 기뻤지요.”

올해 4월의 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 장면
올해 4월의 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 장면

현재 그의 시설에는 10년 이상의 경력을 갖춘 1급 언어치료사들만 근무하고 있지만 그는 지금도 직접 수업을 하고 있다. 잠시 문밖에서 지켜본 그의 수업은 너무나 자상하고 진지한 모습이어서 가슴이 뭉클했다. 여고시절부터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던 꿈들, 이제 어느 정도 이뤄지지 않았나 싶지만, 그에게는 소망이 하나 있다고 했다. “내과, 치과 등 병원시설과 운동시설 그리고 어렵사리 고교를 마쳤으나 직장도 없고 대학 진학도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한 기술학교 등의 시설이 갖춰진 곳, 그러면서도 수화통역서비스, 생활보조인, 도우미 등 모든 관련 서비스가 한 공간에서 다 이루어져 보호자는 아무 염려 없이 자신의 본연의 일터나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데이케어센터(day care center) 같은 곳. 그룹 홈이나 수용시설이 아닌, 익숙하고 행복한 가정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시설과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고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런 곳, 가칭 ‘장애인재활종합복지타운’을 지금도 꿈꾸고 있습니다.”

소녀처럼 눈빛을 빛내며 앞으로 하고픈 일들을 이야기하던 그와 소년 같은 미소로 인사를 하던 초로의 신사, 그 부부의 ‘말’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체온이 만져질 것만 같았다.

만약에 내가 언어장애를 갖고 있다면? 참 막연하고 우울한 질문이다. 우리는 과연 한 시간, 혹은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을까? 그 당연한 일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을까? 

맑은 눈동자의 그가 말했다. “아기가 태어나서 ‘엄마’라는 한 마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하는지 아세요? 만 번입니다.” 만 번, 그 만 번의 연습을 통해 토해내는 엄마라는 한 마디! 그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면서 왠지 감사하고 숙연해지는 하루였다.

이경애 시민기자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