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부조(扶助)라는 단어의 깊이를 생각하면 장례식장에서만 쓰기에는 아쉽다. 상부상조가 고루한 단어로 들리지만 사실 협동보다 더 친숙하고 의미는 훨씬 분명하다. 차마 어쩌지 못하며 안타까워하는 정감에서 출발해 쓰러지고 주저앉지 않도록 서로 부축하고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부조라 할 수 있는 농민수당이 가시화되고 있다. 모든 농민에게 일정한 액수를 지급하는 정책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접근 방식이 다르고 지향하는 진보도 다르다. 농민수당의 쟁점과 의미를 간략하게 들여다보자. 

대개의 농업보조금·직불금은 농사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 다양하게 차등 지원된다. 반면에 농민수당은 농사짓는 농민이면 그게 누구든 보편·균등하게 지급하자는, 사람 중심의 정책이다. 기존 농정패러다임과는 달라서 속도는 더디고, 이런저런 반박도 있다.

대표적으로, 왜 농민들에게만 세금으로 수당을 주느냐는 반박이 있다. 자영업자도 청년도 너도 나도 힘든 건 마찬가진데 불공평하다는 주장이다. 한편에는 농민수당을 지급하더라도 차등지급이 더 합리적이라는 반박도 있다. 부잣집 아이들에게 무상급식 혜택을 주느니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더 주라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둘 다 얼핏 일리는 있으나 이번 경우는 잘못 짚었다. 

강원도는 내년부터 6만7천 농가에 월 5만 원씩 연간 60만 원을 지급하고, 몇 년 후에는 연간 120만 원까지 증액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아직 다듬고 보완해야 할 것도 많고, 의회가 조례와 400억 예산을 통과시켜야 가능하다. 해남군 등 농민수당을 자력으로 이미 시행중인 기초지자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지역상품권으로 지급한다면 지역경제 선순환 효과는 덤이다.

생각해 보자. 강원도 농가 한집에 월 5만 원씩, 몇 년 뒤에는 최대 10만 원씩 지역상품권으로 지급하자는 계획, 이것으로 농민들의 살림살이가 확 펴지겠는가? 어림도 없다. 소득 보전의 의미로 따지면 아이들 장난 수준이다. 

물론 농가경제의 엄혹한 현실을 아는 사람은, 월 5만 원 상품권이 낯간지럽기는 해도, 어쨌든 소득 보전을 하는 것이니 나름 진보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예 아니함보다는 낫기에, 농민들도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농민수당은 소득 보전이기는 하되 소득보전정책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의 지향이 다르다. 대체 뭔가?

모든 농민은 깊고 넓고 오래된, 농업농촌의 공익적·다원적 가치를 수호하는 사람들이다. 농민수당은 이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면서, 농업농촌이 지속가능하도록 수고해 달라는 사회적 감사와 연대의 표현이다. 소농이든 대농이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모든 농민은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재산에 따른 차등 지원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농민수당과 관련해서는 불공평하다거나 세금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농민수당이야말로 세금이 모처럼 제대로 쓰이는 방향이다. 그동안 세금은 농민에게 직접 돌아가 힘을 북돋운 적이 없었다. 간접적인 지원으로 농산업·토목·유통·대학·연구소 등으로 흘러들어갔을 뿐이다. 장례식장에서 엉뚱한 곳에 부조한 셈이니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농민은 한 줌만 남고, 농촌은 텅 비었으며, 농업은 활력이 없다. 

농민들은 농사지어 우리를 살리고, 논밭과 산에 깃든 생명을 돌보고, 다들 빠져나간 농촌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그러므로 농민수당은 최소한의 사회적 부조다. 소중한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남은 관리자들이 더는 지쳐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최소한의 예의이며 최소한의 성의표시다. 부조에서 더 나아가 성취되어야하는 진보는, 농민의 존재 역할에 대한 마땅한 인정과 그에 합당한 예우다. 

농민수당은 월 5만 원이 아니라 월 100만 원,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 맞다. 농민을 공직자로 대우하는 사회적 진보, 우리는 부조 너머의 진보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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