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삐삐가 한창 유행이어서 중학생만 돼도 너도나도 허리에 알록달록한 삐삐를 차고 다녔다. 그러나 실은 우리에게 삐삐는 일종의 장식품이었다. 어른들이야 유용하게 사용하던 통신장비였을지 몰라도 겨우 고등학생인 우리에게는 매달 통신료를 내야하는 값비싼 장난감에 불과했다. 이성친구가 있는 친구들은 하루에도 몇 통씩 달콤한 말을 녹음하곤 했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이따금 시시껄렁한 장난을 칠 때나 쓰곤 했다.

나는 친구들 중에서도 특히 동민(가명)이와 단짝이었다. 동민이네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밥도 얻어먹고 잠을 자기도 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동민이도 없는 집에 가서 혼자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가 영화를 보기도 하고 동민이네 어머니와 놀기도 했다. 동민이 어머니는 성격이 호탕하시고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셔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동민이네 어머니도 나를 거의 아들처럼 아껴주었다. 그래서 나는 동민이네 식구처럼 지냈다. 아마 우리 둘 다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생김새나 체격도 비슷해서 다른 친구들에게 쌍둥이 같다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어느 날 동민과 나는 삐삐를 가지고 놀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삐삐를 치고, 음성을 남기고, 전화로 확인을 하는 것은 너무 번거로우니까 숫자로 암호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0’은 학교, ‘1’은 체육관, ‘3’은 오락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리 둘만의 암호를 정해나갔다. 번호는 늘고 늘어 백여 개에 이르렀다.

어느 날 동아리 활동을 끝내고 막 교문을 나서려는데 삐삐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해 보니 10번이었다. 10번은 동민이의 집이었다. 뭐, 같이 게임을 하자거나 농구를 하잘 게 뻔했지만 일단 동민이네 집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누구세요?”

신호가 몇 번 울리고 나서 누군가 전화를 받았고 나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내가 예상한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동민이나 동민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예상했던 터였다. 그런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래도 몰라서 나는

“저…, 거기 동민이네 집 아니에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뭐라고?”

하는 대답이 들렸다.

‘분명 익숙한 목소리인데 누구더라…, 앗!’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엄마였다. 그렇다. 동민이네 집에 전화를 건다는 것이 그만 집으로 전화를 걸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엉뚱한 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더 바보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머릿속이 완전히 꼬여버린 것이다.

“아니…… 거기 진수(내 이름)네 집 아니에요?”
“진수 집? 니가 진수 아니가?”
“네. 맞아요.”
“니 살짝 돌았나? 와 카노?”
“그게…, 저……” 

정리 |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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