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인
이충호 편집인

30년 전 서독에 도착했을 때 가장 낯설었던 문화 중 하나는 TV 프로그램이었다. 최고 시청률을 보장하는 황금 시간대(prime time)인 저녁 7시부터 10시 사이에는 공영방송뿐만 아니라 상업방송까지 하나같이 토론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프라임 타임을 채운 TV 프로그램이 어떤 종류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아마 지금 요리사나 의사, 연예인들이 나와서 하루 종일 먹는 이야기, 질병 이야기 그리고 신변잡기를 늘어놓고 희희낙락해대는 것처럼 저급하고 비루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독 TV 토론의 주제는 언제나 그날 벌어진 사건과 사고였다. 국내든 해외든 가리지 않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모든 날들이 그날에 걸맞은 사건과 사고, 화제를 몰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들은 그날 벌어진 역사를 토론으로 기록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동독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 이스라엘과 아랍의 분쟁 등 그들이 TV에서 보여주는 토론은 매일 쓰는 역사 교과서에 가까웠다. 그날의 의제에 대해 공영방송은 당사자나 전문가를 테이블에 앉혀 깊이 있고 균형 있게 조명하고, 상업방송은 품격과는 거리가 먼 감정적 액션도 마다하지 않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독일인들은 깨어있는 동안 평균 20분마다 한번 꼴로 ‘나치’, ‘유대인’, ‘홀로코스트’ 등 과거의 원죄를 듣거나 보거나 의식한다는 통계가 있다. 악의 무리에 가담하지 않기 위한 민주시민교육의 결과다. 그들은 토론을 통한 합의가 정글의 법칙을 깨고 공동선으로 방향을 틀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1976년 노사 동수의 이사회 구성을 핵심으로 하는 ‘공동결정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킴으로써 독일은 노동자가 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가 되었다. 우리 눈에는 혁명 같은 법이었지만 독일 연방의회에서는 찬성 389 대 반대 22,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보수당인 기독민주당(CDU)도, 기업인의 입장과 자유 시장경제를 내세우는 자유민주당(FDP)도 대부분 찬성표를 던졌다. 특히 노사공동결정제가 통과되도록 기여한 자민당 원내대표 볼프강 미슈니크(Wolfgang Mischnick)의 연설은 압권이었다.

“한 나라의 시민은 정치적 주체로서 강한 힘을 가진다. 그런데 경제적 주체로는 노예로 살고 있다. 도대체 말이 되는가?”

정의와 진실을 찾던 광장 민주주의(Agora Democracy)가 폭력과 조롱으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다. 절충점을 찾기 위해 찬반 양측이 한 광장에 모여 합리적 토론으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게 아니라 따로따로 모여 자기네 주장만 늘어놓고 저마다 ‘승리’를 선언한다. 민주주의의 ‘가치’마저 ‘부피’와 ‘숫자’로 측정하려 들고 있다. 내전에 가까운 정쟁으로 대의 제도는 망가지고 광장은 분열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삶 위로는 더욱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훈육이 사라진 가정, 오로지 상급 학교로의 진학만을 위한 학교교육, 계급화가 뚜렷한 사회구조.

문득, 아일랜드의 시인 브렌던 케널리(Brendan Kennelly)의 경구가 떠오른다.

“당신이 이 시대에 기여하고 싶다면, 이 시대를 배반하라.
If you want to serve the age, betray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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