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옥 명창

지난 10월 12일, 서울 남인사마당에서는 기연옥(64) 명창과 ‘(사)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부르는 ‘춘천 의병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구한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전라도의 기우만, 경상도의 이강연, 강원도의 유인석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떨쳐 일어나 험난한 항일투쟁을 시작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의병아리랑’.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리/ 싸우다 싸우다 나갈 길 막히면/ 국외로 망명하여 춘추대의 지켜라/ 대장부 깊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차라리 자결하여 목숨을 구걸 말라” ('춘천의병아리랑' 일부)

아리랑을 ‘고난의 꽃‘이라고 한다. 고난을 극복한 곳에서는 아리랑이 불려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통시대의 내적 모순, 구한말의 혼란, 그리고 35년 일제 치하의 고난, 이를 관통하여 드디어 험한 고개를 넘어 한민족과 함께 해 온 아리랑, 그 오랜 동안 우리에게 아리랑은 매우 특별한 노래로서의 기능을 했다. 집단의 저항적 민중의지의 발현재로, 고통과 모순을 극복한 미래의식의 추동재로, 상상되고 가치화되어 불려져왔다. 이런 점에서 아리랑은 다른 노래와는 다르게 어떤 방향성을 담고 있다. 바로 저항, 대동, 상생의 정신을 담아 공동체의 노래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의병사(義兵史)라는 고난의 시공간에서는 아리랑이 어떤 모습으로 피어났을까?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 기념앨범에서 발췌

기연옥 명창      사진 제공=기연옥
기연옥 명창      사진 제공=기연옥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 기연옥 이사장은 호남 유림의 위정척사 사상을 잇는 기정진의 후손이며 의병 기우만의 고손녀이다. (기우만은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고종 퇴위와 함께 조직을 해산하고 은둔하여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기록 또한 전해지는 것이 미미해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뜨거운 피로 대의와 명분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간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고조부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요. 아버지나 집안 어른들이 ‘우리는 의병의 후손이다’라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그 후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고 춘천 북산면에도 기 씨 집성촌이 생겼지요. 저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리가 너무 좋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소리꾼이셨어요. 상여가 나가면 맨 앞에서 소리를 매기셨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좋던지…, 더는 따라갈 수 없을 때까지 따라가다 돌아오곤 했어요. 소리가 너무 좋아서 평생 소리를 하며 살고 싶었지만 완고한 할머니, 여러 가지 여의치 못한 형편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지요. 그렇지만 항상 가슴에 담아두고 살았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들 다 키우고 나서 묻어두었던 꿈을 다시 찾고 싶었어요. 남편의 반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저는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자신의 삶에 대해 좀 더 깊게 알고 싶어 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신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병 아리랑의 보존과 계승 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 부분을 많이 알려주기를 바란다는 그에게 많은 것을 묻기가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의 열정과 소망들이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의미 있는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2년, 그는 자신보다 먼저 소리를 시작한 친구를 따라 전국 국악경연대회에 출전해 뜻밖의 장려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그 후, 결코 쉽지만은 않은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경기민요를 하던 그가 의병 아리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기씨 종친회’에 나가게 되면서였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자라왔지만 종친회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치열하고 처절했던 의병의 투쟁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는 그러한 의병 정신을 계승하고 그 유훈과 유적을 찾아 그 혼령들을 위로하고 싶었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만 있다면 그 정신을 후손들에게 계승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2년, 우리의 아리랑 192종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거기에는 의병아리랑도 포함되었다. 그해 12월, 그는 우여곡절 끝에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를 발족하게 되고 다음 해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 기념 앨범을 제작하여 ‘춘천의병아리랑’을 비롯해 11곡의 아리랑을 담아냈다. 

`제7회 전국아리랑경연대회’ 소리·연주 부문에서 1위 수상.      사진 제공=기연옥
`제7회 전국아리랑경연대회’ 소리·연주 부문에서 1위 수상.            사진 제공=기연옥

그는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다. 석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수업을 위해 두 시간 남짓을 자동차로 달려간다고 한다. 소리하는 일에 극렬하게 반대만 하던 남편도 함께 가는데, 그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정에서 기다려준다고 한다. 소리의 꿈을 이룬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춘천 동면 월곡리에 땅을 천 평 정도 사 놨어요. 거기에 아담하고 정갈한 의병아리랑전수관을 짓고 싶어요. 사 놓은 지 12년이나 되었는데 아직 첫 삽도 못 뜨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요?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미래의 동량들에게 우리 민족의 혼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쯤이면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격렬하게 그의 꿈을 응원했다.

“너무 힘들지요. 모든 것을 개인의 힘으로 해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 예산지원이나 후원이 조금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도움이 절실할 때가 많답니다. 이제 끝났지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10년 소리해서 국악강사 자격증 받은 회원이 사는 밥이니 함께 가요.” 잡아끄는 그를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 따끈한 갈비탕 한 그릇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 ‘사람은 무엇에 집중하고 살아야 하나?’ 혼자 물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소한 행복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분명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애써 모르는 척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싸 배띄어라// 춘천아 봉의산아 너 잘 있거라 신연강 배턱이 하직이로구나/ 우리나 부모가 날 기르실 제 성대장 줄려고 날 기르셨나/ 귀약통 납날개 양총을 메고 벌업산 대전에 승전을 했네” -‘춘천의병아리랑’에서

하필 진눈깨비가 내리던 그날, 불을 붙이면 꺼지고 다시 붙이면 또 꺼지는 양총을 들고 싸웠던 그들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으로 흐르고 있을까.

이경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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