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 독후감상문대회 수상작

나도 고양이를 기른다. 모두 3마리인데 저마다 성격이 다르다. 하얀색 털을 지닌 첫째 양군은 다른 고양이들과 어울리기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 새로 근무하게 된 학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해 몹시 힘들 때 만난 고양이라 남다른 정이 들었다. 양군 덕분에 웃음을 되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태지, 막내 근영이는 모두 길에서 데려왔다. 태지는 한 대학생이 비 오는 날 구조했는데 키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데려왔고 막내 근영이는 집 앞에서 밤새 울고 있어 가족이 되었다.

오랜 시간 고양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내가 고양이를 기르는 게 아니라 고양이들이 나를 기르는 것 같이 느낀다. 업무 스트레스로 힘이 들 때, 사람이 싫어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 그러면서도 외로울 때 고양이들은 그저 내 옆에 있다. 그 작은 등을 내 몸에 기대 잠들고, 같이 눈을 깜박이며 인사하고, 내 손길에 ‘그르릉’ 편안한 소리를 내고…. 그런 순간들이 정말 큰 위로가 된다. 

연우가 모리와 복동이, 진국이의 마음을 몰라 줄 때는 너무 슬펐다. ‘네가 힘들다고 해서 그 아이들을 힘들게 하지 말아 줘’,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모리는 그저 기다렸다. 진국이도 복동이도.

사람과 동물은 서로 다른 별개의 종이 아니라 같이 연결되어 있다.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에선 크레마가 은주, 연우와 대화를 나눈다. 그건 과장이 아니다. 서로의 마음을 느끼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 있다. 마음을 써서 서로를 본다면, 알 수 있는 게 있다. 그건 연우가 엄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다. 

그리고 연우 어머니의 죽음과 은주 아버지의 변화는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다. 선량한 사람들에게 닥친 불행만큼 슬픈 것은 없다. 아내의 과로사 판정을 위해 자식도 챙기지 못한 채 그에 매달린 연우 아버지, 한때 건실했던 가장이 폭력적으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은주와 은주 어머니. 그들의 고통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엄마의 죽음에 표정을 잃어가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던 연우의 고통은 하물며 더욱 그렇다. 작가는 사회의 부조리와 그로 인한 고통, 슬픔, 분노를 너무도 담담히 보여준다. 그래서 더 슬프고, 더 눈물이 난다. 

매스컴에서는 매일 매 시간 무슨 사고가 났고, 몇 명이 죽었으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 보도된다. 그 보도들을 보면 거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으면 그저 숫자로 기록될 뿐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더욱 많이 읽혀져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더 많이 읽어야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이 있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쉽게 잊는다.

또 이 책에는 생명과 삶에 대한 당연한 존중이 있다. 거리의 개와 고양이를 거두는 연우 아버지, 나비를 챙기는 은주, 버려진 고양이를 챙기는 대장, 또롱이의 죽음을 막으려던 복동이와 진국…. 생명과 삶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그대로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만이 이유를 붙여 생명 값을 매기고 삶을 저울질한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살던 곳과 식구들에게 인사하던 복동이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진심을 다해 살았을 때 그렇게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복동이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삶의 죽음은 더 큰 사랑으로 남는다는 것을. 연우와 연우 아버지는 복동이의 죽음으로 마음을 열고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 책에는 다른 죽음도 많이 나온다. 또롱이, 길고양이들, 진국이, 사회의 부조리로 인한 억울한 죽음…. 이야기를 남길 틈도 없이, 인사할 새도 없이 갑자기 죽음은 찾아오고 남은 사람들의 마음은 무겁다. 그 무거운 마음은 자신과 남을 해치기도 한다. 

연우 아버지의 노력으로 다른 사람들은 과로사를 인정받게 되었는데 연우 아버지는 그걸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은주 어머니는 다시 장사를 시작하고, 은주는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위로를 받았다. 슬픔과 분노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고, 예측할 수 없는 시련에 삶이 끝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로 내 노력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는 몹시 괴롭다. 그 때는 그저 하루 한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나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인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도, 고양이도 살아 있는 한 오늘 하루를 다시 살아갈 수 있다. 

고양이들을 키우니 거리의 고양이들이 더 잘 보였다. 새끼는 새끼대로, 큰 아이들은 큰 아이들대로 안쓰럽다. 그들이 곧 추워질 계절을 잘 보내고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선 학생들과 함께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했었다. 이곳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

김순남(퇴계동)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