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 (청년노동자)
이현석 (청년노동자)

‘설리’가 자살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그런 가운데 인터넷 한 귀퉁이에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쓰인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의 글쓴이는 “연예인이란 대중들에게 있어 ‘사람’인가”라는 질문과 “연예인의 자살에 공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글쓴이는 진정한 의미의 ‘사람’이란 관계 맺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화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연예인은 대중들에게 있어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그들의 삶이 대중들의 삶과 괴리가 있는 한 공감도 어렵다고 했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의 ‘인성’에 대해서 지적했다. 그러나 지적의 대부분은 글에 사용된 비속어나 멸칭에 국한됐고, 그가 연예인의 죽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와, 심지어는 분노까지 하는 이유에 대해 사회적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 사태를 보며 나 역시 ‘공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공감이란 비슷한 경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평등한 경험이 핵심이며, 글쓴이가 이야기한 ‘관계 맺기’ 역시 공감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반면 연민은 보다 못한 환경에 처한 이들에게 느끼는 감정으로 상하관계가 핵심이다. 비경험적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 

인터넷상에 글을 쓴 이는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조차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설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그에게 설리의 죽음은 연민은커녕 공감의 대상조차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 역시 개개인의 자유인 한, 그런 그에게 누구도 공감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추측해보건대 사회는 그에게 공감을 강요했고, 그로 인해 촉발된 분노가 인터넷상에 그러한 글을 쓰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공감을 강요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이번 사태의 단면에서 보이듯이 공감할 수 없는 이들이 그것을 강요받았을 때 촉발된 분노는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곳으로 튀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작 글쓴이가 분노를 표출해야 할 대상은 분명 그에게 열악한 노동환경을 제공한 자본가,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임에도, 그의 분노는 단순한 비공감의 대상에 불과했던 연예인에게 조준됐다.

그를 분노하게 만든 대중 또한 대부분이 노동자라는 사실은 마치 영화 ‘기생충’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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