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듣는다. 

나는 왜 이 음악이 그렇게 지루하게 들렸을까. 

내가 고등학교 때쯤 이었나보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라는 영화가 육림극장에서 상영되었었고 그 이후에 온통 이 음악 <볼레로>가 매일 만인의 입에 회자되었다. 도대체 어떤 음악이길래 하는 마음으로 처음 들었을 때는 불량한 오디오 시스템으로 인해 시작지점부터 아주 여리게 시작되는 음악이 들리지 않아 계속 볼륨을 키웠어야 했다. 연주가 진행되면서 다시 계속해서 볼륨을 줄여야 했다 자꾸 커지는 음량이 너무 시끄러워서. 

내가 처음 만난 <볼레로>는 그랬다. 똑같이 반복되는 리듬과 비슷한 가락, 나는 실망했고 그 이후에 잘 듣지 않았다. 경상북도 영주에 있던 영주중학교. 새로 부임 받아 간 그 학교의 음악실 앞에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계절은 언제나 겨울의 끄트머리, 봄의 시작점이다. 여리디 여린 연둣빛 새순이 온 나무에 자잘하게 오르는 풍경 앞에서 나는 <볼레로>의 첫 시작 음을 들었다. 작은 북이 아주 여리고 조심스럽게 들릴 듯 말 듯 한 리듬으로 번지는 소리.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플루트의 날렵한 멜로디 한 소절. 그 날 이후 플라타너스는 일년 내내 거대한 Cresc(크레센도-점점 세게)로 연주되는 <볼레로>였다. 어느 해였던가, 서울대학교 음악과 타악기 입시 지정곡이 <볼레로>였다. 똑같은 리듬을 15분 동안 점점 세게 연주하다가 마지막 절정을 찍고 끝마치는 연주. 동일한 리듬으로 같은 템포를 유지하는 것도 무척 어렵겠지만 그 시간 동안 ‘점점 세게’의 강도를 조절하는 일이 보통 일일까 생각하니 그 시험을 출제한 사람도, 그 시험을 통과한 학생도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가 들려주는 볼레로는 너무나 근사했어도, 15분간 연주되는 그 놀라운 테크닉이 무척 경이로웠어도, 그 음악은 여전히 내겐 그렇게 매력적인 음악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음악 이야기를 쓴다고 하니 <볼레로>를 소개해 보라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감동받지 못한 음악은 쓸 수 없어” 라고 일축하고는 생각만 하고 써 볼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계절의 끝에서 다시 한번 이 음악을 만났다. 매일 똑같은 출근길, 똑같은 풍경 속에서 날마다 감탄사를 내뱉게 하는 그 무엇, 기온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어느 날 문득 달라진 산의 빛깔. 나무들이 일제히 제 빛깔을 만들어 온 산의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이 계절에, 갑자기 그 단조로운 리듬을 올라타고 연주되던 각양각색의 악기들이 만들어내던 독특한 음의 빛깔들이 들려왔다. 

이 음악의 진수는 비슷한 멜로디가 반복될 때마다 바뀌는 악기의 음빛깔 바로 그것이었다. 게다가 색소폰이라니. 오케스트라에 편성된 색소폰은 정말 생소하다. 내게 색소폰은 왠지 밤의 음악처럼 생각되는데 오케스트라에 편성된 색소폰이 아주 신사적인 표정이라 그 음색도 아주 독특한 느낌이었다. 뒤이어 트롬본이 색소폰처럼 연주하는 유머도 신선하다. 

기타처럼 들고 피치카토(현을 손가락으로 튕겨주는 주법)로 연주하는 바이올린도 특이하고 재미있다. 전반부를 지나 후반부로 가면서 음의 색깔들이 짙어진다. 이제 점점 f(포르테-세게)의 절정부분으로 치닫는다. 불안할 만큼 커지던 모든 소리들이 단풍나무 밑에 깔린 떨어진 나뭇잎들처럼 일순 모두 흐트러지며 와르르 무너지듯 끝나는 이 기막힌 엔딩. 이 음악이 심장을 뛰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이른 봄, 돋아나는 새순으로 시작되었던 나의 노래가 결국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켜 산의 빛깔을 저렇게 화려하게 물들인 단풍을 보며 끝나간다. 단조로워 보이는 자잘한 일상에 깃들인 깨알 같은 기쁨, 행복, 아픔, 슬픔, 상처들로 완성되어가는 노래. 마지막 순간에 나의 빛깔은 무슨 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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