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지난달 25일 주요 뉴스가 모처럼 농업을 다뤘다. 정부가 WTO 개발도상국지위 포기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수입농산물 관세가 낮아질 것이고 농업보조금이 삭감될 것이다. 시간문제일 뿐 이번 변화가 농업농촌에 타격을 입힐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농민공동행동 성명서의 절절한 목소리를 귀담아들어 보자. 

“계속되는 수입개방정책으로 국내농산물 값은 연쇄폭락을 맞았고 농가소득 대비 농업소득 비율과 국가 예산 대비 농업예산은 역대 정권 중 최저치. 한국농업은 적폐농업정책으로 무너진 지 오래다. 국익은 통상주권을 지켜내는 것부터 시작되며 농업을 살리는 것은 식량주권을 실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문재인 정부가 기어코 농민의 애원을 무시하고 WTO 개도국지위 포기를 선언한다면 우리 농민들은 강력한 투쟁으로 응답할 것이다.”

농민과 농민단체의 격한 반응은 당연하다. 그런데 마지막 대목도 당연하기만 할까? “우리 농민들은 강력한 투쟁으로 응답할 것”이라는 비장한 천명 말이다. 나는 확신한다. 이런 귀결은 절대로 당연한 귀결이 아니다. 여기에는 거대한 함정이 있다. 농민과 시민 모두가 함께 빠지는 함정이다. 그것도 아주 깊고 위태롭다. 

예컨대, 어느 농촌마을에 위험한 폐기물처리장이 들어온다면? 날벼락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날벼락인가? 수십 명 마을 주민들 말고 저 멀리 사는 시민들에게도 날벼락인가? 춘천 레고랜드 사태도 마찬가지. 서울 시민들도 막장 드라마라고 혀를 찰까? 지역 사안은 멀리서는 알기 어렵다. 정보를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내막을 알아도 복잡하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기에도 어지럽다.

농민들의 투쟁이 농민들만의 투쟁으로 귀결될까봐, 나는 그것이 두렵다. 지역 사안과 같은 맥락으로 먼 동네 이야기가 될까봐, 나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지금 농민들의 아우성은 생존권 문제면서 동시에 농업농촌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이 걸려있다. 결코 국지적 사태가 아닌 것이다! 

농업농촌의 미래는 농민들만의 문제라고, 여전히 시민들은 그렇게 여기는 듯하다. 함정이다. 기본적으로 당사자들이 짊어질 짐이고, 힘들긴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정리될 것이라고 여긴다. 진정 이것은 집단 지성의 결과물인가? 역시 촛불을 들 만한 사안은 못 되는가? 

농민단체들도 함정에 빠져있다. 이 가을 농민들은 청와대 앞에서 농업농촌의 숨통을 아주 끊을 것이냐며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분통 터지는 마음은 백번 이해한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누구와 함께 이 절망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시민을 향한 울림은 충분하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이 통째로 빠진 함정은 ‘그건 농민들의 문제’라는 함정이다. 농민과 시민이 분리되고 농촌과 도시가 분리된 결과로 무감각해졌다. 시민들은 농업의 피해는 감수하더라도 반대급부로 다른 이익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 동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농업농촌의 미래와 희망이 더 까마득해지는 것 말고, 시민들은 이익의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을까?

수제 강원도 엿 원료는 수입쌀이기 쉽다. 춘천 막국수는 인도산 메밀국수일 것이다. 막걸리는 농주(農酒)? 수입쌀 막걸리는 희롱할 농(弄) 농주다. 바로 이런 모습들이 반대급부로 얻은 부스러기의 단적인 예다. 개도국지위 포기는 앞으로 보다 저렴한 저차원의 먹거리 시장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그게 바라던 이익인가? 농업농촌을 저렴하게 여긴 대한민국의 가치도 덩달아 저렴해질 것인데 괜찮겠나? 

높은 시민의식으로 저차원을 극복하고 함정에서 함께 빠져나올 길은 있다. 농민은 지쳤으니 시민들이 탈출로를 열어줘야 한다. 첫 번째는 내 밥상 위에서 시민적 자존심과 농민에 대한 우애를 표현하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는 너무너무 어려운 실천이다. 두 번째 세 번째도 있다. 더 어렵다. 자세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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