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단풍이 진다. 이제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핏빛처럼 붉은 빛깔. 농염하면서도 어찌 저렇게 순할까. 어제는 그토록 현란한 붉은 잎사귀들이 오늘은 바닥에 새로 돋는 꽃처럼 떨어져 눕는다. 떨어져 내리는 것들이 텅 비어 있는 시간처럼 가볍다. 잠자리 날개처럼 얄팍한 무게로 일제히 쏟아져 내리는 건 지나간 시간들 인가보다. 그래서 저렇게 찬연한 빛깔로 처연할 수가 있는 거겠다. 가을 특유의 빛깔. 이별이 예고된 고혹적인 슬픔이 배어나오는 색.

단풍나무 아래서 너무나 아름다운 붉디붉은 나뭇잎이 내리는 풍경을 보다가 꼭 이런 빛깔의 음악을 떠올린다. 바버(Samuel Barber)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Adagio For Strings, Op.11). 너무나 아름답지만 깊숙이 아픈 핏물 같은 빛깔의 음악.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래, 언니 한 번 들어봐” 하고 예쁜 후배가 건네준 카세트테이프 에서는 현충일 행사장에서 추모곡으로 울려 퍼지던, 슬프면서도 묘하게 아름답던 어떤 음악을 꼭 닮은 선율이 흘러나왔었다. 그랬는데 그건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나보다. 얼마 전 예술의 전당에서 디토 앙상블의 모차르트 페스티벌 공연에서 마지막 날 마지막 앙코르 곡으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곡을 연주하겠다며 짧은 묵념과 함께 연주된 곡이 바로 이 곡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루스벨트 대통령, J. F. 케네디, 그레이스 켈리의 장례식 때도 이 음악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음악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영화 ‘플래툰’에서 이미 떠난 헬리콥터를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구원요청을 하던 엘리어스 하사의 몸에 무수히 날아와 박히던 총알. 처절하게 쓰러지던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으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바버는 미국의 작곡가이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탓에 이렇다 할 음악가가 없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사무엘 바버는 전면에 내세우고 싶은 작곡가가 아닐까? 지휘자로 이름을 널리 알린 미국의 자존심 레너드 번스타인처럼. 그래서 어쩌면 ‘플래툰’이라는 미국영화에 미국인 작곡가의 곡인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번스타인 지휘로 삽입한 이 영화는 오롯이 미국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랬을지라도 음악으로 인해 영상은 기가 막힌 비극적 아름다움을 배가 시켰으며, 어쨌든 바버라는 작곡가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되었으니 절묘한 조합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는 바이올린 두 대와 비올라 첼로, 네 대의 악기로 편성되는 현악4중주로 작곡된 곡이었다. 후에 현악오케스트라로 편곡하여 다시 만들어낸 이 곡은 첼로의 지속적인 음위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현악기 특유의 아찔한 슬픔을 담은 소리로 비감하게, 느릿한 속도로 천천히 움직인다. 

현대작곡가인 바버의 선율이 고전적인 선율처럼 편안하지만은 않다. 듣다 보면 불안한 느낌이 덩어리째로 상승하는 부분이 있다. 귀가 째질 것 같이 갑자기 모두 한목소리로 엉겨서 달려 들 듯 높이 치솟다가 갑자기 뚝 끊어진다. 숨 막히게 투명하고 날카로운 침묵. 그리고 다시 처음처럼, 슬프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본래의 선율로 돌아와 아련하게 끝을 맺는다. 가을에는 정말 듣고 싶은 음악이 참 많지만 이 곡은 단풍이 지는 자리에서 생각나는 음악이다. 

오늘은 바닥에 깔린 단풍의 색을 그대로 닮은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기왕이면 번스타인의 지휘로 들어보면서 ‘플래툰’의 마지막 대사처럼,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내 속의 적과 한 번 마주쳐 볼 일이다. 우리의 가을은 슬프지 않은 아름다운 엔딩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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