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인
이충호 편집인

스펙이 부족해 사회로 나갈 수 없다고 굳게 믿는 아들에게 편지 한 통 써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았다. 어린 시절 믿게 된 산타클로스를 현실 속에서 찾고 있는 서른 살 청춘에게 축구 뉴스 두 개를 공유하는 것으로 편지를 대신한다.

장면 1#: 이탈리아 그로세토 지역의 축구클럽 인빅타 사우로(Invicta Sauro)의 유스(youth) 팀은 경기에서 27-0이라는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그런 승리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고 판단한 클럽 회장은 기뻐하기는커녕 상대 구단에 사과하고 감독을 해고했다. 선수들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대승을 차지하고 해고 통보를 받은 불행의 아이콘 리키니 감독은 공개편지를 띄웠다. “나는 그 팀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포츠는 그런 것이다. 나와 우리 선수들은 누구도 상대방을 모욕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최소 몇 골만 넣자’고 해야 할까? 경기 시작 10분 만에 경기를 그만 하자고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겐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를 접하며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반대로 0-27로 패했다면 어땠을까?’였다. 클럽 이름 속 ‘Invicta’가 ‘정복할 수 없는, 무적의, 불패의’ 뜻인 걸 감안한다면 그 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승리했음에도 지도자를 잃은 아이들의 당혹스러움은 또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쓰임과 버림을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만든 자에 달렸음을 새삼 깨닫는다. 

장면 2#: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9일,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올해 11월 첫 번째 주말에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경기가 펼쳐졌다. 독일 통일 이후 분데스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베를린 더비가 열린 것이다. 옛 동베를린 지역의 FC우니온과 서베를린 지역의 헤르타BSC 베를린이 분데스리가에서 펼친 첫 번째 베를린 더비였다. 

역사적인 의미도 부여할 겸 헤르타BSC 측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을 기념하여 경기를 11월 9일에 열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창단 후 하위 리그를 전전하다 113년 만에 1부 리그로 올라온 FC우니온 측은 거절했다. “더비는 경쟁, 전쟁을 의미한다. 독일 화합이라는 이름 아래 친근한 성격의 경기는 모순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장벽을 사이에 둔 두 나라의 젊은 세대는 분명 동화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9년을 살고 있는 그들의 현실 속엔 상대에 대한 주저함과 혐오감이 더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전 세계 205개국에 동시 송출된 이 역사적인 더비는 끝내 두 팀 응원단 사이 부끄러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의 쓸모에 대한 고민과 의심을 핑계로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주저앉은 서른 살 청춘에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소설보다 더 기이한’ 세상뿐이다. 모순된 현실에 분노하고 행동하는 청춘은 응원하겠지만 그런 세상이 두려운 나머지 방구석으로 기어든 청춘에까지 공감하지는 못하겠다. 서른이 되어도 여전히 가족에게 손 벌리는 것은 더더욱 참지 못하겠다. 

자랑할 만큼의 실력이 쌓여야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고, 자아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청춘이 버려야 할 신화다. 당당함은 지식과 정보가 안겨주는 스펙이 아니라, 직접 삶과 부딪히며 배우는 지혜와 성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늑한 둥지를 떨치는 비행이 없다면 푸른 하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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