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술 (발도르프 교육활동가)
안경술 (발도르프 교육활동가)

정신을 차려보니 알록달록하던 길가의 가로수가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그 아래 낙엽도 어느새 말끔히 커다란 자루에 담겼다. 낙엽 더미에 앉아 낙엽을 뒤집어쓰고, 낙엽을 뿌리는 신나는 표정의 아이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모래, 물, 흙, 자연물, 아이들이 지치지 않고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재료다. 조르고 졸라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는 기쁘다. 그러나 새 장난감이 아이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유효기간은 1주일, 길어도 한 달이 못 된다. 다시 장난감이 진열된 가게를 지날 때마다 아이는 또 다른 것을 갖고 싶어 한다. 캐릭터가 정해진 로봇, 버튼으로 작동되는 기능 있는 놀잇감들, 언뜻 모양이 정교해 보이는 게 어른 눈에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기능에 대한 탐색이 끝나면 그뿐이다. 흥미 없어진 지루한 플라스틱덩어리가 된다. 아이는 관심 갖지 않고, 자리는 차지하고, 버리자니 비싼 가격을 떠올리며 고민하게 된다.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공감하는 일일 것이다. 

2013년부터 전국의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공통으로 적용된 누리과정은 만3, 4, 5세 연령별 생활주제와 369개의 내용으로 진행되어왔다. 연령별 과다한 교육내용으로 유아기에 이미 초등수준의 내용까지 제공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전국의 유아들이 획일화된 교육을 받게 되는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 언제 놀아요? 이제 놀아도 되죠? 난 쌓기가 좋아!” 언어, 신체, 역할, 쌓기, 음률, 미술, 자연 탐구 등 다양하게 구성된 흥미영역에서 자유선택으로 ‘놀이’ 하는 아이들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보면 아이들은 흥미영역에서 놀이를 한 것이 아니라, 과제를 수행한 듯하다. 2019 개정 누리과정이 시행되면 아이들은 이제 과제 같은 놀이가 아닌 진짜 놀이를 마음껏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유아들에게 삶에서 필요한 지식, 기능, 태도 등을 길러주려고 했다. 이제는 유용한 지식, 기능, 태도를 길러주려 하기보다 유아들이 일상의 경험을 통해 즐기며 스스로 자라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반갑게도 개정 누리과정을 통해 추구하는 인간상이 수립되었다. 건강한 사람, 자주적인 사람, 창의적인 사람, 감성이 풍부한 사람,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 이는 초등과정에서 추구하는 인간상과도 연계가 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아동 중심, 놀이 중심 과정을 선택한 것이다.

교사 주도로 계획한 놀이가 아니라 온전히 아이 중심의 놀이를 보장하는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아이들은 스스로 도전하고 탐구하며 놀고 배울 수 있는 존재다. 오랫동안 주제에 따라 놀이를 계획해 온 현장의 교사들에게 아동 중심의 놀이과정이 다소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참 좋아하겠다”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주도해 놀이하며 보내는 일상을 통해 충분한 배움이 통합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에 가장 불안해하고 우려하는 이들은 아이들의 부모들이다. 주제와 목표가 있고, 그에 따른 교재와 교구로 놀이하는 과정은 아이들에게 놀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한 목표의 달성이 아이에게 진정한 배움인지도 돌아보아야 한다. 교재와 교구 또한 기능 있는 놀잇감과 다르지 않다. 제작한 성인의 의도를 파악하고 나면 더 이상 아이 스스로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지루한 시간이다. 놀이에 빠져 집에 들어가는 것도 잊는 경우를 떠올려 보면, 모래, 흙 놀이터, 숲 등 아이들이 바꾸고, 상상할 수 있는 자연물이나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 놀잇감으로 있는 곳이다. 나무토막, 돌멩이, 아이 힘에 맞는 사다리, 모래주머니, 천 등은 기능이 정해지지 않아 아이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며 놀 수 있는 좋은 놀잇감이 된다. 교사가 그 자리의 동반자로 참여하여 아이들을 관찰하고 지원하는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 간 소소한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고, 온몸을 사용해 쌓고, 짓고, 허물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며 배워간다. 신체, 의사소통, 사회관계, 예술, 자연탐구활동이 통합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고, 곧 배움이 된다. 염려를 잠시 내려놓고, 낙엽이나 모래가 있는 곳을 찾아 아이들을 데려가 보자. 어른이 이끌려고 하지 않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놀이에 빠져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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