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평화공존을 향한 한·일 평화포럼’ 기조강연

1920년생으로 1세기를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 지성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와 막사이사이상 수상자인 아키바 타다토시 전 히로시마 시장이 ‘동북아 평화공존을 향한 한·일 평화포럼’의 기조강연을 맡았다. 김 명예교수는 한·일간의 평화 구축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해, 아키바 전 시장은 히로시마 피폭이라는 사건을 통해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함께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김형석 교수 기조강연 초록]
21세기, 한·일 관계와 시민들의 과제

김형석 교수의 기조강연
김형석 교수의 기조강연

 

20세기 인류는 전쟁을 치르면서 절대주의에서 상대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과거에는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으냐는 믿음이 대립했고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21세기는 상대주의를 찬양한다. 상대주의는 다원성과 공존을 추구한다. 불행히도 북한만이 유일하게 아직 절대주의를 추구하고 있지만 인류사의 커다란 움직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언젠가는 중국처럼 변화를 받아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닫힌사회에서 열린사회로의 변화는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 닫혀있을 수는 없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양국 간의 불행한 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러·중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안보협력이라는 국제적 여건도 있었지만 인적교류, 문화교류가 늘어갔고 화해와 협력은 증대되어 갔다.

그러나 최근 일본의 우파적 성격을 계승하는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군국주의로 회기하고 있다. 한·미·일 협력에 금이 가고 한·일 관계는 대립의 길로 들어섰다. 결코 과거로 가서는 안 된다. 또 과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지만 미래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때에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먼저 인적교류를 늘여야 한다. 한국에서 독일인 제자와 가깝게 지낸 적이 있다. 지금 할머니가 됐지만 아직도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찾아온다. 독일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린다. 인적교류란 이런 것이다. 둘째 문화교류를 증진시켜야 한다. 문화에는 인종도 국경도 없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년 뒤인 1949년은 괴테 탄생 200주년의 해였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은 기념행사를 할 여력이 없었다. 그때 미국이 대신 행사를 치러 줬다. 문화의 힘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다. 셋째 경제협력을 늘려야 한다. 선의의 경쟁은 당연히 있어야 하겠지만 한·일 사이의 경쟁과 협력은 동아시아 전체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정치교류는 가장 마지막이다. 시민들의 교류와 협력이 우선되고 정치는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키바 전 시장 기조강연 초록]
버섯구름 위의 시각과 아래의 시각이 협력하려면 

아키바 전 히로시마 시장의 기조강연
아키바 전 히로시마 시장의 기조강연

 

히로시마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20세기 최대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한 사건에 대해 일본과 미국은 상이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거의 자동적으로 피폭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 이른바 ‘버섯구름 아래에서의 시각’이다. 반면, 미국인의 경우 트루먼 대통령이 투하 직후 기자회견에서 말한 대로 “일본이 먼저 진주만을 공습했다”, “원자폭탄 투하 덕분에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그 결과 25만 미군과 25만 일본인의 목숨을 구했다” 라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버섯구름 위에서의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의 상징적 사건이 있다. 1980년 6월, 워싱턴D.C.에서 피폭자이자 원폭자료관 관장인 다카하시 아키히로 씨와 원폭 투하 폭격기 ‘에노라게이 호’의 기장인 폴 티베츠 씨가 만났다. 다카하시 씨는 “우리 피폭자는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어떤 입장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핵무기를 사용하는 과오가 반복 돼서는 안 된다는 결의로 국내외에 피폭자의 실상을 알리고, ‘히로시마의 마음’을 계속해서 호소해 왔습니다. 당신도 핵무기 폐기를 위해서 노력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티베츠 씨는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이었습니다. 앞으로 만일 전쟁이 일어나서 원폭을 투하하라고 명령을 받는다면 나는 또 같은 일을 하겠지요. 그것이 전쟁의 논리이며, 군인의 논리입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논리대로 대응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절대로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입장은 달랐다. 그러나 전쟁을 객관화함으로써 공통의 토대위에 설 수 있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협력하는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일어난 하나의 ‘화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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