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인
이충호 편집인

언제나 정의를 이기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명성이다. 

전기 개발 과정에서 벌어진 직류와 교류의 전류 전쟁을 다룬 영화 ‘커런트 워(Current War, 2017)’를 보면서 깊이 공감한 대사다.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발명가 에디슨은 대중들로부터 높은 인기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초조함에 사로잡힌 나머지 경쟁사 웨스팅하우스를 음해할 목적으로 사형수 전기의자를 만드는 데 은밀한 도움을 제공한다. 이 일로 법정에 불려 나왔을 때 위기를 모면하게 만들어준 인기와 명성은 끝내 그의 치부를 드러내는 결정적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에디슨이 태워버리라고 주문한 비밀 편지가 그의 명성 때문에 태워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증거로 남았기 때문이다.

명성은 시장의 원리를 무시하고 움직이는 힘을 갖는다. 평판과 정통성을 잃지 않는 한 좀처럼 위기를 맞는 일도 없다. ‘미식가의 바이블’로 불리는 기드 미슐랭(Guide Michelin)의 경우도 그랬다. 프랑스의 타이어 회사인 미슐랭이 1900년부터 매년 발간하는 여행·식당 안내서로 엄격한 블라인드 심사를 거쳐 최고의 레스토랑에 별을 부여한다. 별 3개짜리 식당은 전 세계 100여 곳에 불과할 정도로 평판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만큼 높다. 

미루나무처럼 꼿꼿하던 기드 미슐랭의 명성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지난 2003년 프랑스의 유명 셰프였던 베르나르 루아조가 자신의 레스토랑이 3스타에서 2스타로 떨어질 거라는 소문이 돌자 자살한 게 그 시작이었다. 압박감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기드 미슐랭의 별을 포기하는 사례도 2005년 시작된 이래 매년 늘고 있다고 한다. 과거엔 축복이었지만 불황기엔 운영비만 높이는 저주라며 30~40대 젊은 셰프들은 요식업계 엘리트주의에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의 마르크 베라 셰프는 2스타로 강등된 날 식당 직원들이 다 같이 울었다고, 자신은 그 후 6개월간 우울증을 앓았다고 고백했다. 현직 요리사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1월 법원에 기드 미슐랭을 상대로 평가 사유가 적힌 서류를 넘겨달라는 소송도 제기했다. 

기드 미슐랭은 2017년 미슐랭 가이드 서울의 발간과 함께 한국에도 상륙했다. 다른 나라와 차이점이 있다면 별점을 둘러싼 금품 수수 등 의혹과 함께 법적 공방으로 번지는 데 채 3년도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별 1개를 받은 한 쉐프는 등재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등재됐다며 미슐랭 측을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또 다른 셰프는 최상위 등급인 3스타를 받는 조건으로 수억 원의 컨설팅 제안을 받았고, 그 제안을 거절하자 가이드북에서 자신의 레스토랑이 누락됐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에서 화려한 쇼가 펼쳐지는 자리에 눈먼 돈이 빠질 리 없다. 관광공사와 한식진흥원은 성실한 ‘을’의 자세로 지난 2016년 음식 관광 활성화를 위한 MOU를 체결, 미슐랭 가이드 서울 제작에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간 총 20억 원을 지원하기로 오만한 ‘갑’ 미슐랭 측과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기드 미슐랭 고유의 블라인드 심사는 시대를 앞서간 전략으로 높이 사지만 미식가로 치장한 졸부의 허세와 그들을 겨냥한 요리사들의 칼춤은 가벼움 그 자체다. 기드 미슐랭이 영업기밀이라고 주장하는 별점 평가 기준이 법원 명령에 의해 공개되었을 때 식당 문고리에 걸린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별에 목숨 건 요리사들과 그 반짝이를 보고 들어가 지갑을 열었던 식도락가들의 반응이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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