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나비소셜컴퍼니 CSV 디자인연구소장)
김윤정 (나비소셜컴퍼니 CSV 디자인연구소장)

20대, 나 홀로 배낭여행을 감행했던 적이 있었다. 무작정 길을 떠나 발길 닿는 곳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자유를 만끽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살던 곳에서 만나지 못했던 많은 일 중에서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던 것이 농사였다. 산과 들이 가까운 춘천에서 자랐지만, 손에 흙 묻혀보는 일은 놀면서 흙장난하던 것이 전부였다. 시골 친척 집에서 간혹 고추 따고, 무 뽑아보던 시절의 흙 내음이 기억 속에 살아있었던 걸까? 흙 만지는 일이 무척 하고 싶었다. 여행 중 한 달 가까이 호주 시골마을에서 농장 일을 하며 지냈다. 발아된 모종을 옮겨 심는 일, 컬리 플라워를 수확하고 간간이 트랙터도 운전하는 일, 농장의 강아지와 흙에서 뒹굴던 일을 떠올리면 속이 뻥 뚫리도록 너른 대지와 쨍쨍한 볕, 물뿌리개가 자동 분사되면서 피어오르는 흙 내음이 살아난다. 허리 한 번 펴는 것의 시원함, 그늘에 주저앉아 먹던 도시락의 꿀맛, 모자를 들어 만나는 바람 한 줌의 반가움은 계산되지 않았던 길 위의 배움이었다. 여전히 삶을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다.

얼마 전 협동조합 지역 사례연구를 하던 중 만난 충남 홍성의 ‘꿈이 자라는 뜰(꿈뜰)’ 농장을 들여다보며 농사를 통한 성장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휠체어를 탄 학생이 텃밭작업을 할 수 있도록 작업 틀과 이동 공간이 만들어진 텃밭이었다. 장애와 비장애,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유니버셜 디자인’이 적용된 농장이었다. 2009년 특수교육대상학생의 직업과정을 만들기 위한 준비모임에서 텃밭수업을 진행한 것이 출발이었고, 2011년 농장으로 발전했다. 10년의 시간 동안 실제로는 텃밭농사를 넘어선 지역농사, 사람농사를 해 온 셈이다. 더불어 사는 마을을 들여다보면 장애인과의 함께살이가 마을의 힘을 만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꿈틀도 그런 경우다.

《민들레》를 뒤적이다 꿈틀의 이야기를 다시 만난 것은 반가운 편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텃밭농사를 통해 직업과정의 활동을 넘어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는 전인교육으로서의 의미를 찾아간 경험이 전해졌다. 장애가 있어도, 오히려 그래서 자연과 연결되어 생명을 돌보고 도구를 다루는 농사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양한 자극을 통해 몸의 기능을 살리고 의미 있는 자극을 발견하는 노력도 서로가 꾸준히 하면서 결국은 농사를 배우는 것보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배워간다고 한다. 

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더 느리게 적용되기에 모두가 가진 똑같은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지기 일쑤이다. 이런 이유로 꿈틀에서는 텃밭일지를 통해 ‘기록농사’를 짓고 있다. 하루 일의 순서와 내용, 느낌, 텃밭의 변화를 관찰해서 그림으로 남기고,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스스로의 살핌으로 시작되는 수업 방식으로 바꾸게 되었단다. 이미 잘 다듬어 만들어진 틀에 넣기보다 ‘관심(무언가 또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관찰(자세히 그리고 오랫동안 들여다보기)-관계(서로가 이어진 모습과 방식을 살펴보고)-관여(그 관계를 바탕으로 변화를 만들어내기)’의 과정을 중심으로 배움을 반복한다.

아이와의 시간을 돌아본다. 집 화단에서 방울토마토를 키우며 꽃이 진 후 맺힌 초록의 동그란 열매를 보이는 대로 따서 놀던 아이, 동그란 것에 집착하는 녀석이 자라는 몇 해 동안 우리 식구들은 익은 방울토마토를 맛보지 못했다. 그러던 녀석이 열매가 자라고, 익어간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조금씩 기다림과 참는다는 것이 그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그렇게 4-5년이 지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탐스럽게 달린 빨간 방울토마토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노란 바구니에 담뿍 담긴 방울토마토는 맛보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계절이 흐르는 대로 생명은 모습을 바꾸고, 마주하는 사람에게 속삭일 것이다. 눈에 담긴 대로, 손끝에 닿는 대로 숨결을 나누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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