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자라기]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로 마음을 잇고 싶다
[아이와 함께 자라기]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로 마음을 잇고 싶다
  • 안경술 (발도르프 교육활동가)
  • 승인 2019.12.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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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술 (발도르프 교육활동가)
안경술 (발도르프 교육활동가)

“혼자 남자여서 힘들었겠지만 내년에는 남자 후배도 들어올 테니까 네가 잘 챙겨주고. 1년 동안 수고했고 고마웠엉~ 00누나가.” 급하게 간식을 챙겨 먹고 나간 자리에 편지가 펼쳐져 있었다. 딱지 접듯 접었던 그 편지에 가지런하게 적혀 있는 글의 끝부분이다. 위쪽에는 관현악제를 준비했던 노력에 대한 격려와 첫 남학생이라 염려했지만 잘해줘서 고맙다는 인사, 본인들이 떠나더라도 관현악부를 잘 지켜달라는 당부가 담겨있었다. 

1934년 개교해서 8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춘천여자중학교가 2019년부터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며 봄내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봄내중학교에 첫 남학생으로 입학한 주, 아이가 관현악단 모집공고를 보고 와 “들어갈까?”하고 물었을 때 반가웠다. 낯가림이 있는 편이라 생각하며 새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기를 마음으로만 바라고 있던 참이었다. 관현악단은 아침연습을 위해 조금 일찍 등교하기도 하고, 점심을 일찍 먹고 모여서 연습을 하기도 한다. 매일 그렇게 시간을 내어 연습을 하니 개인수업의 진도도 빨라지고 아이도 첼로를 더욱 즐기는 듯 보였다. 여름방학에는 “관현악캠프”가 열렸다. 일주일간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 파트별로 선생님이 지도하고, 개인연습, 그룹연습, 합주연습으로 일주일을 지냈다. 아이는 더운 여름날을 하루도 빠짐없이 자전거를 타고 즐겁게 학교에 갔다. 그리고 가족들은 마지막 날 캠프를 마무리하는 작은 연주회에 초대받았다. 

분주한 일들을 모두 멈추고 참석한 음악회! 연습실의 한쪽에 꾸린 무대, 관객들과 연주자들이 맞닿을 듯 앉았지만 지휘자 선생님, 연주하는 아이들, 관객들 모두 연주회 내내 진지했다. 3학년과 2학년에게선 선배들의 노련함과 보살핌이, 1학년 아이들에게선 풋풋함과 어색함이 보였다. 단원 중에는 기존에 악기를 하던 아이들도 있지만 입학해 처음 악기를 시작한 아이들도 꽤 많으며, 개인악기 없이도 학교악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놀라고 기뻤다. 학교에서 악기를 시작할 수 있다니! 더구나 매일 연습을 하니 연주 실력이 느는 것은 시간문제다. 개인레슨을 받거나 학원에서 악기를 배우는 것은 부모가 음악에 관심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학교에서 악기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학생 누구나 본인의 관심과 의지만으로 악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교육선진국의 사례를 듣는 것 같아 마음 뿌듯하고 괜스레 자랑스러웠다. 

단원들이 꽤 긴 곡을 노래로 연주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이 연습했을까? 연주회를 마친 아이는 “엄마가 올 줄 몰랐는데…, 바쁘시잖아요” 하며 수줍게 기뻐했다. “당연히 와야지, 예세의 연주회인데.” 한 학기 농사를 잘 지어 추수한 자랑스러운 농부의 표정을 아이에게서 봤다. 연주를 마친 아이들은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했다. 한 명 한 명 어깨를 감싸고 등을 두드려가며 “잘했어! 고생했어!” 한참 동안 인사가 이어졌다.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학생들 간의 다툼이나 괴롭힘 사건은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그리고 12월 말 무릎이 맞닿을 듯한 교실이 아닌 ‘백령아트센터’에서 2019 봄내중 관현악제가 열렸다. 가족들 20여 명이 관객이었던 여름캠프연주회와 달리 객석은 친구인 학생들과 가족, 지인들로 가득했다. 객석의 아이들은 무대에 선 아이들의 이름을 목이 아프도록 부르며 네가 거기 있고, 내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고 응원했다. 2부 마지막 아이들의 반주에 맞춘 선생님들의 합창,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던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불렀다. 00샘~~00샘~~선생님은 거기, 나도 여기 있어요, 하는 외침으로 그들이 하나임을 확인하는 마음이 느껴져 뭉클했다. 관현악제를 마친 예세가 선배에게 받아온 사탕 선물과 쪽지 편지! 선배 둘은 후배들 모두에게 편지와 선물을 준비했다. 늦은 밤까지 써 내려갔을 열 줄 편지에서 선배로서의 사랑과 모범이 느껴졌다. 과거처럼 강요나 억압이 아닌 즐거움으로 신나게 음악회까지 할 수 있게 한 보이지 않는 힘이 보였다. 예세에게 그 손 편지를 얻어 간직하고 싶다. 새해에는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는 메신저가 아니라 손으로 꼭꼭 눌러 쓴 편지로 마음을 잇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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