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문화비평가)
이정배 (문화비평가)

1990년도 들어 본격적으로 영화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만난 감독이 폴란드의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1941~1996)였다. 가볍게(?) 《세 가지 색: 블루》(1993)로 출발해서 《레드》(1994)와 《화이트》(1994)를 독파하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내친김에 그의 대작인 《데칼로그, 십계》(1989)에 도전했다. 한 주간에 한 편씩 곱씹으며 10주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4편을 마쳤을 즈음, 소련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 감독이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그리스의 테오 앙겔로풀로스(1935~2012) 감독과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1898~1956) 감독까지 딸려왔다. 화면 전환이나 공간 전환이 매우 긴, 소위 롱테이크의 3대 거장이라는 인물들이다. 이들을 만난 건 행운이자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중에 가장 치명적인 작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86)이었다. 제목에 걸맞게 이 작품은 영화에 관한 희생정신 없이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그런 영화였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이들 영화를 대할 때마다 멀미가 일었다. 속을 달래기 위해 잠시 미술로 도피했다. 겨우 인물화와 풍경화를 지나는 듯싶더니 결국 정물화를 마주 대하게 됐다. 

아뿔싸, 이놈의 오지랖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정물화의 어원을 더듬다 덜컥 ‘스틸라이프(Still Life)’에 걸려들고 말았다. 스틸(Still)은 ‘고요’, ‘정적’, ‘침묵’으로 번역하고, 라이프(Life)는 ‘생명’, ‘삶’, ‘생물체’로 번역할 수 있다. 결합한 단어인 ‘스틸라이프(Still Life)’는 생명을 가졌으나 지금은 없어진 상태이거나 처음부터 생명이 없던 물체를 의미한다. 

놀랍게도 ‘스틸라이프’라는 제목의 영화가 더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지아장커(1970~ ) 감독의 《스틸라이프, 三峽好人, Still Life》(2006)와 이탈리아 태생의 우베르토 파솔리니(1957~ ) 감독의 《스틸라이프, Still Life》(2013)가 있는데, 이들 작품을 발견하고 예전의 멀미 증상이 재발할까 봐 무척 걱정했다. 

다행히 평화롭게 이들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마 미술공부 덕분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사적으로 영화를 보지 않고 미술 작품 감상하듯, 특히 정물화를 감상하듯 영화를 본 게 큰 도움이 됐다. 나아가 미술 관점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경험했다. 비로소 미술적 영화 또는 시적 영화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했다. 

요즘도 가끔 시인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이탈리아의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1922~1975)를 회상한다. 이야기 중심 영화인 소위 할리우드 계열의 영화가 아닌 이미지 중심의 시적인 영화를 대할 때면 더욱 그렇다. 이제 한 장면이 10분 정도 지속하는 것쯤은 쉬워졌다. 그 시간 동안 부단히 움직이는 심장과 두뇌 운동을 즐기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나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와 같은 영화를 통해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는 인생의 대명제를 터득할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가슴 뿌듯한지 모른다. 하여, 또다시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1940~2016) 감독의 영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를 만지작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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