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유일의 대장장이 박경환 ‘강동대장간’ 대표
"아버지의 망치질 소리엔 격이 있어요, 배우려고요"

대장간에서는 낫이나 호미 같은 농사에 필요한 도구들이 만들어진다. 섭씨 3천500도에 달하는 뜨거운 화덕이 있는 곳이다. 차갑고 딱딱한 금속은 대장장이에 의해 자유자재로 다듬어져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한다. 이렇듯 대장간은 철을 요리하는 곳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주변에서 대장간을 보기란 쉽지 않다. 

Q. 대장간을 운영하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이 자리에서 시작을 하신건가요?

A. 아버지께서 1963년부터 운영하셨고, 저는 1996년도에 시작해 본격적으로 대장장이 일을 하게 된 건 1999년도부터죠. 그러니까 이 대장간 나이가 쉰여덟이네요.

경동대장간을 찾은 어진선 금속공예가(오른쪽)와 대장간 안 풍경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박경환 대표.
경동대장간을 찾은 어진선 금속공예가(오른쪽)와 대장간 안 풍경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박경환 대표.

Q. 그러면 사장님이 계속 하시면 언젠가는 100년, 100살이 되겠네요.

A. 허허~ 100년은 안돼요. 난 여기서 아흔 살까지밖에 못 살아. 난 그때까지는 일 못 해요.

Q. 자녀분이 이어서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A. 첫째가 지금 스물셋인데, 사실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부터 방학 때는 학교를 안 갔어요. 내가 데리고 나와서 일을 시켰죠.

Q. 방학마다요?

A. 수업하잖아요. 자율학습, 보충수업. 아들 학교 교장 선생님한테 편지 보냈어요. “민속의 맥이 끊이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라고. 교장 선생님이 내 은사님인데, 내 성깔을 아시니까…. 그래서 방학 땐 학교를 안가고 여기 나와 일했어요. 메질하고 허드렛일도 하고. 군대 말년 때 나와서는 “아버지 일을 배우면 안 되겠습니까?” 묻더라고. 근데 대장간 갖고 두 가족 먹고 살기는 힘들고, 점점 일거리도 사라져 가는데 아빠 대에서는 어떻게든 유지는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의 대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지. 그러다가, 그러면 네가 한 가지 기술을 가지고 와라 그랬죠.

Q. 어떤 기술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A. 금속 관련 쪽으로 일을 하면서 대장간 기술을 배워라, 두 가지 일을 하면 충분히 생활은 될 거다 했죠. 지금은 이천에서 돈 벌고 있어요. 내년 3월에 관련 학과에 다시 입학을 해서 금속 공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3년쯤 하고 나서 들어올 거예요. 융합, 복합 이런 게 뜨잖아요. 커피에 빵도 팔고, 예술을 하면서 찻집을 한다든지…, 그런 게 아니면 요즘엔 힘들더라고요. 나도 젊었을 때는 여러 직업을 가졌었어요. 기자, 금속표면처리 일 등등.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춘천에 내려와서 대장간 옆에 낚시가게를 열었어요.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이 일을 배우기 시작한 거죠.

경동대장간 2대 대표인 박경환 씨가 제품을 다듬는 모습.
경동대장간 2대 대표인 박경환 씨가 제품을 다듬는 모습.

Q. 아, 낚시점 운영하시면서 배우게 되셨군요. 아드님한테 왜 그러셨는지 대충 짐작이 가네요.

A. 일을 할 때는 도와야 하니깐 대장간 가서 메질을 하고, 낚시점 손님 오면 헐레벌떡 뛰어가서 손님 받고 그랬죠.

Q. 사장님은 어렸을 때 아버님이 대장간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많이 보셨을 텐데요. 대장장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그 당시 혹시 해보셨나요?

A. 어머니 손잡고 도시락도 갖다드리곤 했어요. 그때는 어렸을 때라 그게 부끄러웠어요. 아버지 직업을 적는 란에 ‘상업’이라고 적었던 것도 기억이 나요. 난 우리 애들한테는 대장장이는 부끄러운 직업이 아니라고 가르쳤어요. 시대가 변하긴 했는데, 사람들 인식은 글쎄요. 아직도 좀 먼 것 같아요.

Q. 호미가 지금 외국에서도 유명하잖아요. 외국인들이 사가기도 하나요?

A. 호미가 유명해지기 전인 2006년도에 LA에 사는 한인에게서 전화가 왔었어요. 품목별로 1년에 분기별로 500개씩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못한다고 했어요. 그만큼의 수량을 뽑아낼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고, 제의가 들어와도 난 안 해요. 우리 아버님 때도 수량으로 승부하지는 않았으니까. 혼자 만드시는 게 정해져 있었으니까.

Q. 나중에 아드님하고 대장간을 운영하실 때도 대량으로 하지는 않으실 건가요?

A. 안 하지. 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수량이 많아지면 품질을 보장할 수 없으니까. 처음엔 나도 낫을 하루에 40개씩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되돌아보니 내가 부끄러운 거예요. 품질을 생각하면 점점 수량을 줄이게 되더라고요.

Q. 제대로 만들다 보니 수량이 줄어드신 건가요?

A. 계속 줄어드는 거죠. 내가 만들 수 있는 양은 그거니까. 대장간에서 만든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게 아니거든요. 재료선정부터해서 메질이 대장장이 일의 꽃인데, 망치질도 하나의 격이 있고 곱게 다듬으라는 뜻인데,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곱게 놨을 때, 정타를 놨을 때 아주 맑은 소리가 나요. 메가 기울어지거나 그러면 안 좋은 소리가 나고. 아버지 망치소리는 아주 경쾌하고 맑은데 왜 나는 둔탁한 소리가 나지? 처음에 혼잣말로 그랬어요. 지금도 그 망치소리를 따라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거지요.

대장간에서 금속재료를 두들겨 원하는 형태로 만들고자 할 때 필수적인 공구인 쇠받침대 '모루'와 망치. 경동대장간의 오랜 연륜이 묻은 듯 망치 손잡이의 표면이 거칠다.
대장간에서 금속재료를 두들겨 원하는 형태로 만들고자 할 때 필수적인 공구인 쇠받침대 '모루'와 망치. 강동대장간의 오랜 연륜이 묻은 듯 망치 손잡이의 표면이 거칠다.

Q. 장인들이 만든 작품에 찍는 도장 같은 게 있다고 하던데 사장님은요?

A. 20년 되면 찍으려고 했는데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30년은 해야 그래도 겨우 낙관이라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 대장간 문양이 있어요. 찍는다면 그 문양이 그대로 가야 하지요. 아버지 때는 그걸 찍었어요. 아버지께서 우리 삼형제를 뜻하는 문양을 만드셨죠.

Q. 젊은 분들도 대장간을 찾아오는 경우가 있나요?

A. 나를 통해서 벌써 공방 3개가 생겼어요. 그중 하나가 양구에 있는데, 내가 화구랑 집게까지 만들어줬어요. 그리고 이제 대학 신입생이 된 친구가 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한테 대장장이 일 배운다고 매주 토, 일요일을 1년이 넘도록 오갔어요. 그 친구가 제대로 많이 배워갔지. 고3 때도 오더라고. 그때는 공부해야 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Q. 사장님 꿈은 무엇인지 들려주세요.

A. 대장간 박물관도 하나 만들어 보고 싶고, 전승관도 꾸려보고 싶고 내 개인작업장도 하나 가져보고 싶은 소원이 있어요. 내가 아들한테는 딱 그랬어요. 3년만 너 가르쳐 주고, 난 차에 대장간 꾸며서 뜨내기 대장간하며 다닐 거라고. 하하하.

어진선 금속공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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