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소설가)
하창수(소설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좋은 사람’이 있다. 남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좋은 사람’과 남들의 인정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좋은 사람.’ 둘 모두 진짜 ‘좋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은 상존한다. ‘진짜’라는 수식어에 값할 만한 ‘좋은 사람’은, 두 상황을 교묘히 거스른다. 진짜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남들의 인정을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럽게 여기며, ‘좋은’이란 수식어는 물론 그 반대편의 ‘나쁜’이란 말을 끌어다 자신을 반어적으로 수식하는 용어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는 호불호의 감정에 엮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거나 몸을 숨기는 일이 잦아 오히려 똑똑치 못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거나 심지어 비겁한 사람으로 몰리기도 한다. 

이 씁쓸한 이분(二分)의 논리는 기실 ‘사람’ 앞에 붙일 수 있는 거의 모든 수식어를 공유한다. 훌륭한, 착한, 멋진, 부드러운, 뛰어난, 똑똑한, 박식한, 천재적인, 같은. 수식어만이 아니다. ‘사람’ 대신 지칭어를 붙여도 마찬가지다. 예술가, 학자, 법조인, 정치인, 언론인, 교사, 학생, 운동선수, 연예인, 기업가, 같은. 남들로부터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거나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훌륭함의 실질과는 전혀 다른 자, 남들로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거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체적 똑똑함과는 먼 거리에 있는 자, 남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거나 스스로 천재를 자부하지만 천재는커녕 아둔의 극한을 달리는 자 - 세상에서 이들을 만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지식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존재한다.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 혹은 지식이나 학문, 교양을 갖춘 사람 - 사전에서 ‘지식인’을 찾았을 때 나오는 개념이다. 지식인의 연원을 찾아 백 년 이전으로 훌쩍 올라가면 ‘좌파’라는 수식어가 붙는 자들과 만나게 된다. 러시아혁명(1917)이 일어나기 이전의, 흔히 ‘인텔리겐차’라 불리던, 혁명적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 굳이 이런 사전적·역사적 개념에 기대지 않더라도 지식, 학문, 교양이란 어휘는 보수보다는 진보에, 수구적 성향보다는 개혁적 성향에 더 근사하다. 변화에 민감하지 않은 지식,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하지 못하는 학문, 열린 사고에의 종사를 거부하는 교양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지식, 학문, 교양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지 못하니 그것들은 죽은 것이고, 인류의 진보에 기여할 수 없다.

‘지식인’에게도 서두에 언급한 씁쓸한 이분의 논리는 고스란히 적용된다. 사전을 들추었을 때 나오는 개념에 어김이 없어 누구나 ‘지식인’이라 불러주는 자들이 부지기수지만, 기실 지식인의 실체와 실질로부터 너무 먼 거리에 놓인 자들이 그렇게 불리는 경우가 상상 이상으로 허다하다. 그들의 지식은 한곳에 치우쳐 있기 일쑤고, 그들의 학문은 아집이라 불려야 마땅할 만큼 고리타분하며, 그들의 양심은 양심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구린내를 풍긴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만)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안달 이상의 노력을 기울인다. 때에 따라 말을 바꾸는 그들의 솜씨는 그들을 뛰어난 재담가로 만들고, 틀렸음이 증명되었을 때조차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후안무치는 그들을 지조 있는 자로 만들며, 나라의 안위보다 사적 욕망에 충실한 그들의 국가관은 그들을 인민의 행복을 위해 투쟁하고 헌신하는 자로 산화하게 만든다.

북 치고 장구 치는 자가발전이 미덕인 SNS 만능의 시대, 모든 ‘쓸 만한 인간’은 하나같이 연예인이거나 연예인화된 인간이고야 마는 시대 - ‘인간’은, 점점, 경박과 천박 사이를 오가는 ‘조건’들로 규정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경박하고 천박한 내 개인적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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