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아주 선하고 착해 보이던 사람이 있었다. 웃는 얼굴이 선량해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잘해주던 그 사람을 나는, ‘나의 가브리엘’이라고 불렀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삶 속에서 함께 손잡고 걸어가며 어려울 때 서로 힘이 되어주는 도반일거라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어떤 상황이 되자 그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고, 그로 인해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 옛사람들의 말을 되새기며 한동안 많이 아팠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니, 살아가다 보면 그런 일들이 다반사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의 선택이 꼭 나쁠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 꽤 나이가 들기는 했나 보다. 달콤함이 꼭 좋은 것만이 아니란 것을 새삼 놀랍게 느꼈던 순간이 생각난다. 

독일 가곡을 공부하느라 슈베르트의 <마왕>을 악보로 처음 만났던 날이었으니 아마도 대학교 2학년 때인 듯하다. 학생들에게 음악 지필시험이 있던 시절 음악 시험문제의 단골손님에는 슈베르트가 있었다. 슈베르트의 자장가, 들장미, 보리수, 세레나데 등의 많은 노래가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그를 기억하면 꼭 떠올려야 하는 단어가 낭만파, 예술가곡, 가곡의 왕, 그리고 3대연가곡집이었다. 

시인이 쓴 시에 가락을 붙여 노래로 만든 곡, 즉 가락이 붙어 노래가 된 시를 가곡이라 부른다. 가곡을 노래할 때 피아노 반주가 노래를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면, 예술가곡은 시와 노래와 피아노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가치를 갖는 성악곡을 말한다. <마왕>은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가락을 붙여 만든 예술가곡이다. 이 노래는 담담한 목소리로 배경을 설명하는 해설자와 아기를 품에 안고 다급하게 말을 달려가는 아버지, 그리고 품에 안긴 아기와 마왕 이렇게 4명이 등장한다. 

노래를 부르는 한 명의 성악가는 이 네 명의 기분과 느낌을 잘 표현해서 서로 다르게 노래불러야 한다. 피아노는 오른손으로 노래의 시작부터 끝까지 급하게 말 달리는 소리를 세 잇단음표로 계속해서 연주해야 하고, 왼손으로는 음산한 느낌의 폭풍우와 말발굽 소리를 표현해야 한다. 피아노가 배경을 연주하면 그 흐름 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폭풍우 속에서 아버지가 병든 아들을 품에 안고 말을 달려가고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해설자의 목소리, 마왕이 보인다며 무서워 떠는 아들, 그것은 마왕이 아니고 거대한 안개와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지라고 아이를 달래는 불안한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아이를 유혹하는 마왕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표현했을지 무척 궁금했던 나는 도서관 음악실로 달려가 카세트테이프를 대여해 이어폰을 꽂았다. 그때 들었던 마왕의 목소리는 내가 상상했던 소리가 아니었다. 무섭고 거친 소리가 아닌 달콤하고 보드라운 목소리로 산들바람처럼 밝고 예뻤다. ‘아! 맞아. 대상이 아이였지.’ 그때의 그 놀라움을 잊을 수가 없다. 

달콤하게 아이에게 속삭이다가 맨 마지막 부분에서 말을 듣지 않으면 강제로 잡아갈 것처럼 윽박지르던 마왕의 목소리. 음악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고 긴장을 막 풀려는 순간 ‘죽었다’라는 마지막 한 마디가 얼마나 섬찟하던지.

겨울날씨가 연일 너무나 푸근하다. 호주의 화재 소식도 참으로 우울하다. 폭풍우 속 아픈 아이를 안고 달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 마음으로 거센 불길 속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해본다. 달콤한 편안함의 유혹을 좀 자제해야 할 때이다. 그 부드럽고 달달한 유혹이 언제 급변하여 ‘널 잡아 갈테다’하고 표정을 싹 바꿔 달려들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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