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인
이충호 편집인

나의 평일 저녁과 주말의 반복되는 일과를 꿰고 있는 친구가 수수께끼를 받아 든 표정으로 말했다. “근면과는 한참 거리가 먼데…, 참 성실은 하단 말이야.” 

#나의고2: “아버지, 저…, 가출하겠습니다.” 급하고 강하게 몰려온 바람이 아스팔트 위 플라타너스 낙엽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던 10월, 나는 서너 달 가슴에 꾹꾹 눌러두었던 열병을 귀가하는 아버지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문지방에 앉아 구두끈을 풀던 아버지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그래? 장남이 하고 싶다면 해야지” 한 마디 했을 뿐이다. 한바탕의 회오리를 예상했던 나는 아버지의 싱거운 반응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챙겨둔 가방을 들고 나왔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려는 찰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에서 쫓아왔다. 

“아들아, 부탁 하나만 하자. 네가 어디서 어떤 삶을 살든,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 때에는 그날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잘 지내렴.”

여름 내내 가슴을 불 지르며 환호하던 가출에 대한 열망이 그 말을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사르라 들고 말았다. 잘못된 결정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즉시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풀었다. 마음이 그렇게 평화롭고 후련할 수가 없었다. 

아들에게 낭만 하나를 유산으로 남긴 아버지는 2007년 1월 29일 끝내 화해하지 못한 세상과도 이별했다. 

#고2담임: “걔, 어젯밤 가출했어요!” 조례를 하기 위해 들어간 교실에서 빈자리부터 훑는 나의 눈길에 학생들이 먼저 낄낄거리며 보고한다. 지난밤 가을바람이 고2 청춘의 가슴에 구멍을 내고 흔들어놓았나 보다. 

“그래? 그 친구한테 내 말 한마디만 전해라, 돌아오면 죽는다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열여섯 살에 아버지의 소 판 돈 몰래 들고나가 세계적인 그룹으로 키웠잖아. 그러니 반드시 거기서 성공하라고 전해. 절대 돌아오지 말고.”

하지만 다음날 출근하니 녀석이 교무실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타자는지옥이다: 대개의 조직은 크게 범생이와 날라리, 그리고 오지라퍼로 구성된다. 

근면하고 성실한 범생이. 10시간 공부해서 100점을 받는다. 자신이 아니면 이 사회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다고 믿는다. 토사구팽은 딴 세상 이야기라고 귀 닫고 있다가 나중에 분노한다. 존경은 하지만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유형이다.

근면하지는 않지만 성실한 날라리. 2시간 공부해서 90점을 받는 데 만족한다. 효율을 중시하는 조직의 성장과 함께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토사구팽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회는 개인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잘 돌아간다고 믿는다. 근면을 악덕으로, (지혜로운) 게으름을 최고의 덕목으로 친다. 근면 성실한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다. 

근면하지만 성실하지 못한 오지라퍼. 15시간 공부해서 59점 받은 걸 자랑하고 다닌다. 자신을 사회의 윤활유라 굳게 믿으며 시간을 내고 얼굴 내미는 것으로 인정을 받으려 한다. 사냥개도 아니고, 토끼가 아닌데도 토사구팽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떠벌린다.  

#잘있거라: 근면으로 성실을 판단하려는 노예 시장에서 거래는 범생이와 오지라퍼 사이에 일어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물을 거둬들이는 것뿐이다. 

잘 있거라. 오만한 세계여! 나는 이제 집으로 가련다. 너는 내 벗이 아니요. 나도 네 벗이 아니다. 오랜 세월 너의 피곤한 군중 속을 나는 헤매었다. 대양에 떠 있는 작은 배처럼, 오랫동안 물거품처럼 뒤치락거렸다. 그러나 이제, 나는 집으로 가련다. 오만한 세계여!

- 랠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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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과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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