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 (그믐달시낭송콘서트 대표)
김진규 (그믐달시낭송콘서트 대표)

봄이다. 입춘(立春)을 배웅하고, 우수(雨水)를 마중 나갈 때. 모레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 정양은 <입춘>에서 ‘봄은 목숨 걸고 오는지’라며 이렇게 노래했다. “얼다 녹은 냇물에/ 살얼음 낀다 살얼음 밟듯/ 목숨 걸고 봄이 오는지/ 궁금한 수심(水深)을 길어올리는/ 피라미 한 마리/ 하얀 뱃바닥으로 살얼음을 만져보고/ 갸웃거리며 다시 가라앉는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도통 춥질 않아 피라미가 뱃바닥으로 살얼음을 만져보기나 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봄이다. “봄이 오는 사태만큼 큰 사건이 없다”라고 한 이는 시인 문인수다. 사람이 겪는 사건 중, 꽃이 피는 사태만큼이나 장엄한 사건도 없을 테다. 봄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사랑이요, 꽃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 자신일 게다. “빨리 와라/ 꽃은 열리자마자/ 떨어진다/ 세계는/ 꽃에 맺힌 이슬의 섬광으로/ 존재하느니”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의 가인(歌人) 이즈미 시키부가 노래한 것처럼 봄이 올 때, 봄꽃이 필 때만큼 긴장하고 서둘러야 할 때는 없겠다. “번개를 보고도 생이 한순간인걸 모르고 사는 우리 아닌가. 더러 이 봄에 한 번쯤은 긴장도 하고, 또 그리스 격언처럼 ‘천천히 서둘러’ 봄직도 하다.

봄 춘(春)은, ‘볕(日)을 받아 풀(艸)이 싹 틈(屯)’을 나타내는 글자다. 춘(春)의 고자(古字)는, ‘싹 나올 둔(芚)’이다. 봄은 하늘과 땅이 공명하는 사태. 하늘이 아래로 내려오는 ‘건하(乾下)’, 땅이 위로 올라가는 ‘곤하(坤上)’라는 사건이다. 이를 《주역》의 괘에선 ‘태(泰)’로 나타낸다. 음양이 조화로워 만물이 서로 회통하는 상(象). 이 사태가 ‘태통(泰通)’이다. 봄은 천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태통의 계절’. 음양의 조화로 생명이 움트는 위대한 사건이 벌어지는 계절이다. 이 사건이 지시하는 바는, 단순한 생명력의 개진이 아니다. ‘땅이 하늘의 사랑을 받는 사태’다. 동짓날 이후로 계속해서 커져 온 하늘의 ‘양기’와 오래 묵은 땅의 ‘음기’가 만나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의 열반~! 그래서 그런가. 신라 신문왕 때 미모의 여승 설요(薛搖)는, 이 봄에 반속요(返俗謠)를 남기고 환속한다. “텅 빈 골짜기 사람이 보이질 않네/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장차 어찌할거나, 이 젊음을”

사랑의 열반지경을 아련하게 증거하는 게 또 있다. ‘봄의 싹눈’이다. 김훈은 이러한 사태를 음악에 가까운 풍경이라고 했다. “봄풀들의 싹이 땅 위로 돋아나기 전에, 흙 속에서는 물의 싹이 먼저 땅 위로 돋아난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 속의 길을 예비한다. 얼고 또 녹는 물의 싹들은, 겨울 흙의 그 완강함을 흔들어서 풀어진 흙 속에서는 솜사탕 속처럼 빛과 물기와 공기의 미로들이 퍼져나간다. 풀의 싹들이 흙덩이의 무게를 치받고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흙덩이의 무게가 솟아오르는 풀싹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풀싹이 무슨 힘으로 흙덩이를 밀쳐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물리 현상이 아니라 생명 현상이고, 역학이 아니라 리듬이다. 풀싹들은 헐거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흙이 비켜준 자리를 따라서 풀은 올라온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과연 태통(泰通)의 계절이다.

입춘은 입춘(入春)이 아니라, 역시 입춘(立春)인 것이다. 제 스스로 ‘세워’나가는 것. 우주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 봄의 생기(生氣)는, 봄을 그저 기다리는 마음에서 오지 않는다. 낡은 틀을 뿌리치고 새로운 현장으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에서 온다. 껍데기를 뚫고 나오는 씨앗의 몸짓으로 ‘봄은 세워가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봄바람을 ‘황소’라 했다. “그러나 밭을 가는 황소가 아니라 사납게 날뛰는 황소며, 분노의 뿔로 얼음을 깨뜨리는 파괴자다! 더군다나 깨어져 떠내려가는 얼음은, 저 판자 다리를 무너뜨린다.” 광분한 황소처럼 얼어붙은 겨울을 들이받고, 흔적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깨부수는 것에서 봄은 시작된단다.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이 없는 일이라지만 (……)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정희성 시인 역시 <이곳에 살기 위하여>에서 얼음을 깬다. 봄이 오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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