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라퍼 이인숙

새해맞이를 할 때 준비하는 아이템이 무엇일까? 일출보기와 한 해의 목표 정하기가 아닐까 싶다.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구체적인 다짐과 첫 날 밝게 떠오르는 태양까지 겸비된다면 더할 나위없는 ‘그 해’가 된다. 새해 첫 날만이 아닌 ‘늘 빛난다’는 ‘늘빛’의 호를 지닌 캘리그라퍼 이인숙 씨를 만나보았다.

좋은 글씨로 늘 빛나는 그녀.   단순히 예쁜 글씨가 아닌 한글 창제 원리까지 전하는 글씨를 사랑하는 사람.    

“디자인 전공 후 중소기업에서 총괄 디자이너로 근무했어요. 대학은 언어 전공이었는데 27살에 직장을 그만두고 호주로 갔어요. 그곳에서 3년 반 동안 디자인을 공부하고 귀국 후 공간디자이너로 일했고요. 그런데 제가 배웠던 디자이너의 역할이 한국 사회와 안 맞았어요. 시키는 대로 하는 갑과 을이 너무나 선명히 살아

이임숙 캘리그래퍼. 사진 제공=이임숙
이임숙 캘리그라퍼.       사진 제공=이임숙

있는 문화 때문이라고 할까요? 나중에는 골병들겠더라고요. 만족스럽지 않은 그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배우기 시작한 것이 ‘글씨’였어요. 2011년 디자인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시작했는데 영묵 강병인, 연우 정성옥 두 스승님을 잘 만나서 깊이 파기 시작했어요. 서예와 한글에 대한 이해서부터 훈민정음 공부까지요. 캘리그라피는 쉽게 단순히 예쁘게만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글씨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배웠어요. 점심을 안 먹어가며 그리고 퇴근 후까지 재미있게 배웠던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직장 다니면서 서예를 4년 하다 보니 춘천에서 기회가 왔단다. 춘천시문화재단에서 프로젝트로 후원을 받은 친구의 강의에 캘리그라피 강사로 섭외가 됐다. 8주 간 수업이 끝나고도 계속하겠다는 사람들을 위해 작업실을 나누어 쓰면서 이 길이 시작됐다. 1년 후에 회원 전시회를 열면서 ‘봄내캘리그라피’ 작업실까지 냈다.  

“전국적으로 캘리그라퍼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어요.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급하고 짧게 배운 사람들이 자격증을 받아서 직업적으로 양성되는 것은 좋은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깊이 있게 배워서 본인들의 작품 세계를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거든요. 수강생들에게 자격증을 드린다는 말씀이 없어서인가, 수강생이 별로 없어요(웃음).”

간판 두 글자를 써 드리는데도 천 번 이상을 쓴다고. 작품 하나가 나오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 작가들 사이에서는 아이패드 등 컴퓨터 작업 비중이 많아졌다. 수고로움에 대한 평가와 가치는 컴퓨터나 기계가 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수고로움에 대한 평가와 가치가 제대로 되기를 소망한다고 전하는 그녀. 작가와 작품의 가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이루어졌을 때 큰 기쁨으로 되돌아온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항상 갈구해요.

내 작품에 백퍼센트 만족이 없거든요. 사람들이 내 의도를 읽어주면 기분이 너무 좋아요.

저에게 글자는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즐거운 일이거든요.

사람들이 글자를 예쁜 글씨로만 보시지 말고, 그 안에 담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수고로움을 알아주셨으면!

작가들은 칭찬을 좋아해요. 같이 즐거워 해줬으면 좋겠어요.

서울살이였던 그녀에게 춘천에서의 생활을 물었다. 처음에는 춘천에 학원비 낸다는 생각으로 주말마다 찾아왔다고. 수강생들과 같이 공부를 해 가면서 함께 성장해 나갔기에 아깝지 않은 행복한 시간이었단다. 

“처음에는 너무 두려웠어요, 사람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부담됐고요. 오랫동안 꾸준히 하다 보니 강원대, 한림대, 인재개발원 등에서 연락이 와요. 저한테 글씨를 써 달라 하고 글씨 값을 지불하시는 분들이 생겼어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춘천에 정착하지 않았을 거예요. 춘천에서 만난 분들이 너무 좋아서 아직까지 좋은 인연을 맺고 있어요. 사람이 좋으면 저는 가는 것 같아요(웃음).”

글씨와 글자. 한글과 한자를 두고 오랜 대화를 나누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억이 떠올랐다. 갱지에 네모 칸을 그려 국어책을 보고 베껴 가는 숙제를 하던 기억 말이다. 네모 칸 크기를 아무리 늘려 보아도 ‘ㄹ’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선생님께 지적을 받아 다음날 노력을 해 보아도 지우개로 지우다 찢어진 갱지로 제출하기 일쑤였다. ‘ㄹ’은 공포였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에서 본 ‘ㄹ’이 너무 멋졌다. 비상하며 힘찬 기운을 뿜어내는 글씨였다. 

이임숙 캘리그라퍼의 작품, '을은 없다'.
이임숙 캘리그라퍼의 작품, '을은 없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잘 배치하면 너무 예쁜 글씨예요. 틀에 넣으려고 하니 안 예쁘죠. 초·중·종성의 공간감을 살리고 마지막은 배치를 하는 거예요. 캘리그라피는 좀 더 자유로워지는 글씨고요. 제가 수강생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있어요. ‘틀을 벗어나라, 선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라!’ 탈 네모꼴로 써 보도록 얘기해요. 한글이 원래는 세로쓰기였잖아요. 세로쓰기가 훨씬 쉽고 세련돼 보여요. 영화 <웰컴투 동막골> 포스터에 보면 ‘웰’의 ㄹ이 뒤집혀 있어요, 이게 예전에 선조들이 다 사용했던 민체예요. 원리를 알고 나면 누구나 예쁘게 쓸 수 있어요. 한글은 미울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어린 허세로 영어를 배우느라 한글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미울 이유가 하나도 없는 한글을 좀 더 사랑하기를, 그 안에 담긴 글쓴이들의 수고로움과 가치를 알아주기를,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주기를, 같이 즐거워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춘천에서 한글날 행사를 하고 싶어요! 서울은 광화문 광장에서 크게 하잖아요. 아름다운 글씨로 춘천사람들과 만나고 싶거든요.”

백종례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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