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지역 미서훈 독립운동가 박순택 선생의 4남 박원영 씨

2019년 8.15광복절을 맞이하여 춘천독립운동가 서훈 추진위에서는 미서훈 독립운동가 10분의 서훈을 신청하고 춘천시와 《춘천사람들》을 중심으로 후손 찾기 운동을 벌였다. 이후 11월 초에 독립운동가 박순택 선생의 4남 박원영 씨와 연락이 닿아 올해 3.1절 행사에 참석하며 《춘천사람들》과 인터뷰하기로 계획되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여파로 일정이 취소되면서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춘천독립운동가 서훈 추진과 후손 찾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춘천사람들》이 ‘춘천 독립운동가 서훈 추진 범시민운동본부’과 함께 서훈추진을 위해 후손을 찾고 있었던 박순택 선생(1901~1949). 항일운동 때문에 일제에 의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8개월 복역 후 출소했다.
《춘천사람들》이 ‘춘천 독립운동가 서훈 추진 범시민운동본부’과 함께 서훈추진을 위해 후손을 찾고 있었던 박순택 선생(1901~1949). 항일운동 때문에 일제에 의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8개월 복역 후 출소했다.

Q 안녕하세요? 요즘 어르신의 건강은 어떠신지요? 그리고 본인과 가족의 소개도 간략히 부탁드립니다.

평소에 나름대로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대외 활동이나 각종 모임도 모두 취소하고 1시간 정도 청계산을 산책하는 것 외에는 집에서 독서와 글쓰기로 소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올해 81세로 집사람과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딸도 1남 1녀를 두었고 사위는 변호사입니다. 아들은 미국에 살며 뉴욕의 광고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1남 2녀를 두었지요.

박원영 씨
박원영 씨

Q 작년에 춘천에서는 광복회와 시민단체들이 뜻을 모아 8.15광복절에 미서훈 독립운동가 열 분의 서훈을 신청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바로 어르신의 선친이신 박순택 선생님도 포함되었는데 이 소식을 어떻게 접하게 되셨는지요?

작년 4월 형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상가에서 집안 어른들과 제 아버님의 독립운동에 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여기저기에 아버님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서 너무 놀랐지요. 그래서 서훈 절차를 알아보고 있는데 춘천 친구가 《춘천사람들》신문을 좀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찾아보니 아버님의 서훈 신청 소식이 있더라고요. “와! 살다 보니 이런 영광도 있구나! 만세! 만만세!” 하며 무척 감격했지요.

Q 박순택 선생님은 1925년 동아일보사 춘천지국장을 비롯하여 춘천청년회, 춘천상공회의 임원을 거쳐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강원지부 조직부장을 맡는 등 20여 년간 지속적으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선친께서 살아계실 때는 아직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혹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면 소개 좀 해주시죠.

유감스럽게도 딱 한 번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해방 전 어느 날 퇴근하시면서 태극기를 가방에서 꺼내시더니 “이게 우리나라 국기다. 밖에 갖고 나가 놀면 순사가 잡아가니 잘 간수해라.” 이렇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또렷이 떠오릅니다. 그때는 아버님께서 늘 사업과 외부 활동에 바쁘시다 보니 며칠씩 집을 비우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쩌다 집에 오시더라도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벌써 외출하셨고 우리가 잠들면 들어오시는 날이 태반이어서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기회도 드물었습니다. 그러니 자식들과 함께 놀아주신 기억이 별로 없고 어머님께서도 생전에 그것이 늘 불만이셨습니다.

Q 박순택 선생님은 1929년도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제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8개월이나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1차 서훈 신청자 중에는 박순택 선생님과 함께 운동했던 세 분이 더 있는데 이제는 정말 이념을 떠나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당한 예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념을 떠나 당연히 예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당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많은 분들이 사회주의 계열에 속하였으나 공산주의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영원히 묻힐 수도 있는 역사적 사실 즉 선열들의 애국심과 충정을 이렇게 끝까지 힘들여 발굴해 주시고 서훈 신청까지 해주시니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이를 계기로 나도 이제 여든이 넘었지만 여생을 힘자라는 데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살 것이며, 내 후손들에게도 할아버지의 숭고한 뜻과 애국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가르쳐 나갈 것입니다.

Q 박순택 선생님께서 1949년 50세에 별세하셨는데 그때 어르신 나이가 열 살 정도였으니 이후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말씀해 주시죠.

부친의 작고와 이듬해 벌어진 6.25 전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지요. 30대 중반에 홀로된 어머님은 폐허가 된 빈 땅에서 우리를 먹여 살리고 공부시켜 모두 잘 키워내셨습니다. 춘천은 6.25 때 세 번에 걸친 피난살이가 있었는데, 그 모진 환경과 고생 속에서 우리를 어떻게 굶기지 않고 먹여 살렸는지 지금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다행히 어머님께서 아흔아홉까지 장수하시며 그간 우리가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을 좀 주시고 가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평생 한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춘천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잠시 이모님들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자취를 하며 아르바이트도 해가면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사정이 넉넉지 않으니 점심은 밥만 싸갔고 국과 반찬은 구내식당에서 사서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으며 대학을 졸업했지요. 대학 2학년 때 육군에 입대하여 33개월의 군복무를 마쳤고 졸업 후 다행히 당시의 금성사에 입사,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LG그룹에서만 24년 일했습니다. 정년퇴직 후에는 택배 자영업도 해 보고 중소기업 사장도 하면서 열심히 아끼고 모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리 부부 스스로 삶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1남 1녀 아이들도 제각기 독립하여 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이제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감사하고 여한이 없지요.

2017년 박원영 씨의 가족이 제주도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박원영
2017년 박원영 씨의 가족이 제주도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박원영

Q 최근 일본은 일제 징용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배상판결을 부정하고 무역보복을 가하는 한편 평화헌법 개정으로 군국주의 부활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에게 독립운동가 후손이자 우리 사회의 원로로서 한말씀 해주십시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개방, 개혁한 덕분에 서구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했으며 현재 세계 3위의 경제대국입니다. 과거 식민지 수탈의 역사로 볼 때는 원수 중의 원수지만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침략자로서 악랄했던 일본으로만 보면 도리어 상처만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극일하고 그들을 능가하려면 일본이 넘볼 수 없는 수준의 국력을 축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에 배웠지만 지금은 일본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기술과 기업이 탄생했으니 이미 극일이 가능함을 증명했습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불퇴라 했나요? 그렇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망국의 치욕이 없도록 이제 젊은이들이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깨어나 분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Q 어르신께서는 여든이 넘으셨지만 매우 정정하십니다. 요즘은 백세 시대라고 하니 오래오래 건강을 유지하시길 빕니다. 그래도 남은 인생에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요즈음 보수다 진보다 하는 이념 갈등으로 나라가 너무 시끄러운 가운데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창궐하여 온 국민을 피곤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여야가 합심하여 하루빨리 국운이 회복되고 경제발전과 더불어 자유와 평화가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개인적인 소망은 지금처럼 건강을 계속 유지하되 웰 다잉을 준비하면서 하루빨리 기쁜 소식이 와서 아버님 산소에 고하러 갔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지금 출판 준비 중인 《11살의 난중일기》라는 책이 세상에 나와서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창수(‘춘천 독립운동가 서훈 추진 범시민운동본부’ 추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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