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 (그믐달시낭송콘서트 대표) 

“탕탕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안중근 의사가 쏜 탄환은,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쪽 팔뚝과 팔꿈치를 뚫고서 가슴에, 배에 박혔다. 이토는 누가 쏜 것인지를 묻고서, 조선인이라는 말을 듣곤 “빠가야로 조센징…”이라는 말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침략행위를 동양평화라고 규정하는 자기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저격 후 외쳤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거사 사흘 전인 23일 밤에 안중근 의사는 시를 한 편 지었다. <장부가(丈夫歌)>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시함이여 영웅이 때를 만들리라/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대업을 이룰꼬/ 동풍 점차 차가우나 장사의 뜻 외려 뜨겁도다// 분개하여 한 번 떠남이여 반드시 그 뜻을 이루리로다/ 쥐 같은 도적 이토여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으리/ 이리 될 줄 알았으랴만 이미 돌이킬 수 없노라/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안중근 의사 거사 직후에 중국은, ‘중국인 몇억 명도 못하는 일을 조선인 청년 한 사람이 해냈다’라는 반응이었다. 그들은 부러움과 부끄러움과 존경과 자책이 마구 뒤섞인 심정이었다.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은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알렸으니,/ 살아서 백세에 이르지 못했어도 죽어서 천추에 드리었도다./ 약소국이기에 죄인이고 강대국이기에 재상이라 하였지만,/ 처지를 바꾼다면 이등박문이야말로 죄인이로다”라는 시(詩)로 안중근 의사를 찬양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요 문장가인 양계초는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직접 방청하러 왔을 뿐 아니라,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을 지어 안중근 의사에 대해 한없는 흠모의 정을 드러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내 무덤 의사의 무덤과 나란히 있게 되리.” 원세개도 <안중근 의사 만(輓)>을 써서 안중근 의사를 추모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일제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이미 목숨을 바치기로 했거니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동맹을 할 때 이미 3년 안에 이토를 죽이지 못한다면 자결하겠다는 결심까지 하지 않았던가. 조마리아 여사의 의지도 단호했다. 그녀는 찢어지는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눈물을 돌로 눌러 죽이며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앞서 죽는 걸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어라. (…)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 너와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10시에 순국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조지훈 시인은, <안중근 의사 찬(讚)>을 썼다. “쏜 것은 권총이었지만/ 그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긴 것은/ 당신의 손가락이었지만// 원수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 성낸 민족의 불길이었네/ 온 세계를 뒤흔든 그 총소리는/ 노한 하늘의 벼락이었네// 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차라리 홍모(鴻毛)와 같이/ 가슴에 불을 품고 원수를 찾아/ 광야를 헤매기 얼마이던고// 그날 하르빈 역두의/ 추상같은 소식/ 나뭇잎도 우수수/ 한때에 다 떨렸어라.// 당신이 아니더면 민족의 의기를/ 누가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줬을까// 세월은 말이 없지만/ 망각의 강물은 쉬지 않고/ 흘러서 가지만// 그 뜻은 겨레의/ 핏줄 속에 살아있네/ 그 외침은 강산의/ 바람 속에 남아있네.

키워드
#안중근의사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