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형형색색의 오묘한 빛깔을 천지에 흩뿌려대던 자연이 한 가지 색으로 마무리되는 계절, 길고 긴 겨울을 지났다. 깊은 잠이 들었던 조용한 대지가 수런수런 깨어나는 계절인데 봄보다 먼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도 꽃소식. 계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찬란한 봄이다. 답답하고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려 바람꽃을 찾아 나선 강촌 어귀에서 고개를 쏘옥 내민 노루귀를 만났다. 잔털이 보송보송한 보랏빛의 말간 얼굴을 하고 바람에 가볍게 몸을 흔들어대는 작은 들꽃. 생강나무 노란빛깔이 알싸한 느낌으로 나무에 번져난다. 정말 봄이구나.

“혹시 아델라이데를 아세요?”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졌다. 이 부드러운 봄바람이 길러내는 들꽃 옆을 혼자 걸으며 불러보고 싶어지는 노래. 그 노래의 1절 가사가 지금 내 곁에서 풍경으로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혼자 봄의 정원을 거닌다.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마법의 빛이 나를 둘러싸고, 흔들리는 꽃 핀 나뭇가지를 관통하며 빛은 전율한다. 아델라이데…’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 같은, 피아노 전주가 너무나 예쁘고 고운 노래, 베토벤의 아델라이데(Adelaide). 아델라이데는 ‘고귀한’, ‘귀족의’를 뜻하는 고대 독일어권의 이름인 아달하이디스(Adalheidis)의 변형으로 여자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봄이 오면 알프스 산에 피어나는 키 작은 보랏빛 야생화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시인 마티슨이 꽃의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겨 시를 썼고, 베토벤이 그의 시에 마음이 흔들려 노래를 만들었으리라. 마음이 흔들리는 대상을 서로 다르게 노래할 수 있다는 이 멋진 콜라보에 내 심장도 쫄깃 조여온다. 꽃을 보고 노래했지만 아델라이데는 사랑하는 연인이겠지. 

베토벤이 ‘피아노반주와 독창을 위한 칸타타’라 이름 붙여 발표했다는 이 곡은 노래 부르는 사이사이 색깔 다른 꽃들과 마주치듯 불쑥 튀어나오는 피아노 반주의 색채가 유난히도 예쁘다. 

첼로의 선율은 어떨까 싶어 들어본다. 선율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피아노 반주의 그 깨알 같은 감칠맛이 들리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노래와 함께 들려지는 피아노 반주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슈베르트의 예술가곡은 베토벤의 이런 음악적 토양에서 꽃을 피웠으리라.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참 많은데, 대부분이 남자 성악가들이다. 남성의 성악곡을 듣다보면 고음부분에서 무겁게 누르는 듯 조금 불편하게 들리는 음들이 있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옥의 티가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생각을 하는데 스웨덴의 테너가수 비욜링의 버전을 듣다가 놀란다. 녹음상태가 별로 좋지 않지만 그 거슬리는 소리를 아주 미묘하게 잘 처리해서 아델라이데가 아주 매끄럽다. 그렇지만 나는 독일의 바리톤 디드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가 제일 좋다. 스타트에서 잠시 거칠게 느껴지지만 금방 심장이 두근거린다.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 노래를 부르는게 아니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조분조분 속삭이는 달콤한 고백. 나는 그런 노래가 좋다. 

세상이 무너져도 일상은 내 것이 아닌가. 봄을 지나며 사랑고백을 듣듯 오늘은 디스카우의 아델라이데를 들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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