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술(발도르프 교육활동가)
안경술(발도르프 교육활동가)

릴리가 돌아갔다. 작년 가을, 12년 과정의 독일발도르프학교를 9월에 졸업한 릴리는 K-POP 으로 알게 된 한국에서 살아보기 위해 우리 어린이집에 인턴십을 신청했다. 외국인을 인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보건복지부에까지 질문을 넣어, 독일로 공문을 보내는 등 필요한 서류를 갖추는 과정이 있었다. 모든 서류를 갖춰온 릴리는 유아반 교실에서 선생님의 보조역할을 하며 인턴을 시작했다. 큰아이와 또래라 한방을 쓰며 자동차로 출근을 같이했지만 점심 후 아이들의 휴식 시간까지 근무를 하고, 집까지 3.4km 근 10리길을 매일 걸어서 퇴근을 했다. 대형마트, 서점, 명동상가까지 걸어서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다녔다. 성탄전야에 구봉산에 있는 찻집엘 갔었는데, 집까지 걸어서 얼마나 될지를 계산하며, 아마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거라 했다. 복잡한 버스노선이나, 통하지 않는 대화로 불편할 택시를 탈 일 없이 늘 자유롭게 다녔다. 빨래를 널다가 바짓단이 아닌 허리를 손바느질로 꿰매 줄인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놀라는 내 모습에 적당한 천이 있으면 옷을 만들어 입을 수도 있다고 했다. 3개월 있는 동안 구제가게에서 옷을 사서 스스로 몸에 맞게 고쳐 입었다. 창가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느질을 하는 20대의 모습이 낯설다. 

첫 주, 와이파이 없는 우리 집이 불편하지 않은지 물었다. “불편하지 않아요. 거리에서 무료와이파이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걸요. 독일 친구들과도 쉽게 연락할 수 있어요. 그리고 거실 창가에도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 있구요. 과하게 전화기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못하게 되는 것이 문제예요.”  

모든 발도르프 교사들이 그렇듯 릴리의 손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있거나, 뜨개질로 아이들의 놀잇감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 교사를 도왔다. 릴리가 있던 은하수반에 상어를 좋아하는 아이의 생일이 돌아왔다. 릴리는 직접 상어의 본을 만들고 천을 재단했다. 모직천을 잘라 손바느질로 완성한 상어는 아름답고, 하나뿐이라서 특별했다. 상어를 선물로 받은 아이는 당연히 많이 기뻐했다. 균형 있고 아름답게 완성된 상어에 열광한 것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래, 강아지, 문어…, 교사들의 주문이 이어졌다. 릴리는 기쁘게 패턴을 그려 만들고 본까지 교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네가 은하수반에서 본을 그리고, 재단하고, 솜을 채우고 바느질하여 완성하는 과정을 그대로 아이들이 볼 수 있어서 참 좋고 고마워.” 

“저도 기본은 학교에서 배웠어요. 기본을 알면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죠. 과정을 직접 보는 것은 중요해요. 그것을 함께 한 아이들은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겠다, 해봐야지, 시도하게 될 거예요.”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수공예, 목공예, 농사, 동물 돌보기 또한 다른 과목과 동일하게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경우에도 반제품을 사서 뚝딱 완성하지는 않는다. 뜨개질은 양털 손질에서부터 시작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쓸모 있고 아름다운 결과물을 내는 것이 그 과정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일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코로나19의 감염예방을 위해 개학이 한 달 넘게 연기되며 학교에서는 온라인강좌 수강을 안내하는 연락을 보내왔다. EBS의 인터넷 사이트 접근이 어려울정도로 접속자가 많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이 쉽지 않은 우리 집 같은 가정들도 있으리라. 지적인 학습 외에도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많은 능력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초,중,고 시기 대부분을 ‘지적인 능력과 성취’를 높이느라 시간을 할애한다. 뜻하지 않게 집에서 지내게 된 이 시간,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인터넷강의가 아니더라도 일반가정 아이들의 미디어 노출 시간이 많다는 우려의 소리가 들린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어느 때보다 가족끼리의 시간이 많은 요즘, 조금 생각을 바꾸어 가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시도할 수 있는 기회이다. 밥하기, 청소하기, 빨래하기, 바느질하기, 요리하기…, 셀 수 없이 많다. 중학생이 된 막내의 초등학교 물건을 정리하다 지퍼가 얼기설기 바느질된 책가방을 보았다. “예세야! 이거 왜 이래?” “4학년 때 한 건데 처음 보셨어요? 학교 가려는데 가방 지퍼가 뜯어졌어요. 급하게 하느라 바느질이 좀 이상하지만^^” 바쁜 엄마를 둔 아이는 뜯어진 지퍼를 제 손으로 꿰매 2년을 더 메고 다녔던 것이다. 머리보다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으면 그만큼 자유롭다. 독일로 돌아간 릴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주 해 주시던 두부조림 레시피를 알려주세요.” 단 한 가지, 요리에 자신이 없다던 릴리는 곧 두부조림도 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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