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환(춘천농민회 회장)

이른 아침, 심어놓은 옥수수밭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심은 지 스무날이 되어서도 싹이 나올 낌새도 보이지 않는 옥수수밭이다. 옥수수는 보통 보름 정도면 손마디만큼 올라와 초록의 빛을 자랑한다. 4월 말 5월 초는 진홍빛 꽃의 복숭아, 순백의  배꽃, 올망졸망 엉킨 붉은 사과의 꽃들이 피어나 농부들의 마음을  들뜨게 할 때다.

그러나 올해는 4월 날씨가 3월 날씨 같아 착과가 되지 않을까 농민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심고 가꾸고 거두어들이는 농업에 있어서 기후의 변화는 어느 병충해보다도 더 농민을 위협하는 재난이다. 몇 개월째 전 세계를 재난의 수렁 속으로 몰아 놓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19’ 대응에 국력의 총량을 투여해 극복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늘 자연 재해에 노출되어 있는 농업의 모습의 초라함을 느낀다. 봄이면 냉해, 여름이면 폭염, 가을에는 태풍으로 농민들의 속앓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다행히 자연의 조건들을 잘 버텼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생산한 농산물이 다시 한번 농민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일이 다반사다. 많이 생산되면 가격폭락으로, 적게 생산되면 넘쳐 나는 수입농산물로 애써 생산한 농산물들이 천덕꾸러기가 돼 갈아엎어 버리기도 길가에 내버리기도 한다. 더 있다. 한 해 농사를 정리할 때면 줄줄이 밀려오는 독촉장이다. 농사짓는데 필요한 자재구입 비용 청구서에 비닐하우스, 축사, 농기계 마련하느라 지게 된 부채에 대한 상환고지서에 농민들의 등은 더욱 휘어져 버린다. 

상황이 이러니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은 갈수록 줄어들고 고령화돼 농촌에 아이 울음이 사라진 지는 오래됐다. 매년 물가와 국민들의 1인당 소득은 늘어나지만 농민들의 농업소득은 수년간 정체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1천만 원도 안 되는 소득 수준에 있는 농민이 70%가 넘는다. 농사짓는 농민이 가지고 있어야 할 농지는 비농민이 절반 이상 소유하고 있어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했으며 이런 이유로 매년 여의도의 몇 배의 농지가 사라지고 있다. 

기차여행을 하다 보면 창문 밖으로 보이는 농촌의 들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농민들이 상상하는 농업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다. 초록빛에 둘러싸인 포근함, 주렁주렁 익어가는 과일에서 볼 수 있는 풍성함, 사람의 손으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가을 풍경의 화려함이 농촌의 모습이길 상상한다. 젊은이들이 농촌에 들어와 하루 일손을 멈추고 어린아이 손잡고 노을 핀 하늘을 바라보며 집으로 퇴근하는 정겨운 모습을 보길 희망한다. 달마다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처럼 농민도 노동의 대가를 정기적으로 받고 싶다. 재해 걱정 없이 농산물을 생산하여 제값 받아 생활하고 내년 농사를 위해 저축하면서 겨울을 보내고 싶다. 

농업의 가치는 국민의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면서 국민들에게 휴식과 안식을 주는 국민정원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가치를 국가가 인정하고 국민이 동의해 그 대가로 농민수당을 받으며 농업에 종사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지니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자녀에게 농업을 권유하고 두려움 없이 가업을 이어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마을마다 넘쳐 나는 풍년가를 부르며 마을 주민들이 함께 풍년에 감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공동체가 복원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상황이라면 농민의 손길을 받아 꽃길처럼 가꿔 놓은 논밭 사이로 쑥대밭이 되어 흉물로 방치되고 있는 주인 모를 논밭도 사라지지 않을까.

꿈에서 깨어난다. 힘든 노동에 지친 농업의 고단함이 묻어온다. 사월에 내린 서리는 풍년을 앗아가고 있다. 강원도에서 추진되어 올해부터 받을 수 있었던 농민수당도 사라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개학연기로 친환경 농산물의 학교급식이 중단돼 이를 통한 안정적인 소득을 기대하던 중소농의 꿈 역시 사라지고 있다. 기차여행 차창에 비친 꿈같은 농촌의 모습은 아직 기대하기가 이른가 보다. 눈을 뜨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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