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바람이 부는 날에는 발걸음을 멈추어본다.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마음을 스윽 스쳐 건너는 순간을 느껴보고 싶어서다. 교무실 밖 마당에 서보면 앞산을 휘돌아 내리는 바람소리가 일품이다. 바람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툭 건들며 지나고 그 건드리는 것들을 매개로 자신의 모양을,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인가, 항상 어딘가에서 만나는 바람은 늘 새로운 모습이다.

어느 한적한 숲속 암자에 매달린 풍경을 지나는 바람은 귓전에 풍경소리를 딸그랑 떨어뜨린다. 그 맑고 명징한 소리라니. 쇠에 부딪힌 바람소리가 나뭇잎사귀를 지나는, 바람이 흩뿌리는 풀빛소리에 더할 수 없이 청량한 느낌으로 물방울처럼 마음에 맺힌다. 처마 끝에 풍경 하나를 매달아 놓았던 우리 조상님들은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여고시절 역사시간에 사진으로 포석정을 보며 옛 선비들의 유유자적함과 멋스러움에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자연을 곁에 두고 누리려는 마음. 바람소리를 만들어 듣고, 술잔을 물에 띄워 마시던 사람들의 그 마음이 곧 낭만이 아닐까. 낭만이라는 단어가 너무 식상해져 사용하기 좀 멋쩍지만 그 단어 외에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낭만. 음악에도 이 단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장르가 있다. 

세레나데(Serenade). 이 음악은 성악 세레나데, 기악 세레나데 등으로 분류가 되어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우리는 밤에 연인의 창가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사랑의 노래로 기억하자. 지금처럼 전화도 편지도 여의치 않았던 그 옛날, 사랑하는 연인에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휘영청 달 떠오른 밤, 창문아래서서 달콤하게 부르던 사랑의 노래. 이보다 더 낭만적인 음악이 어디 또 있으랴! 줄리엣의 창문으로 기어오르던 로미오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달뜨는데, 하물며 나를 위해 불러주는 노래라니.

세레나데를 작곡한 작곡가는 많이 있지만 그래도 사랑의 노래하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단연 으뜸이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작곡가 슈베르트는 그 짧은 생을 살면서 7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했고, 그의 예술가곡은 그로 하여금 가곡의 왕이라는 별칭을 갖게 했다. 한 권의 시집에 통째로 곡을 붙인 연가곡집으로 <겨울 나그네>와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가 있다. 슈베르트가 죽은 후에는 그가 죽음을 맞이한 해에 작곡된 14개의 가곡을 모아 <백조의 노래>라는 연가곡집이 출판되기도 했다. 백조는 일생동안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딱 한 번 운다는 전설이 있는데, 슈베르트의 마지막 미발표곡으로 연가곡집을 만들며 <백조의 노래>라 칭했으니 그 제목 또한 로맨틱하다. 

<백조의 노래>에 수록된 14개의 가곡 중 4번째 곡이 <세레나데>이다. 피아노 반주로 심장의 두근거림 같은 멜로디가 시작되고 이어지는 선율은 정말 아름답다. 명랑한 저 달빛 아래 들리는 소리... 낭만의 진수다. 어제는 실낱같이 날렵한 그믐달이 초롱한 금성을 거느리고 하늘 한 귀퉁이에 어여쁘게도 떠 있었다. 달을 찍어보려 폰을 들이대는데 가로등 불빛이 너무 밝다. 휘황한 네온사인에 달빛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 조금 속상하다. 금방 헤어진 연인들은 실시간 채팅을 하느라 그리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네들은 카카오톡으로 선물을 주고받고, 이미지로 꽃다발을 건네고 온갖 이벤트로 상대의 마음을 감동시키느라 투박한 마음 한 조각 건네는 설렘의 방법을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이 괜스러운 염려라니. 이건 분명 라일락 향기 때문일 거다. 

해 저무는 새빨간 양귀비밭에 서 있다가 툭 떨어지던 수종사의 뭉툭한 종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지던 순간처럼, 그립고 마음 졸이던 어느 순간, 창가에서 들려오는 세레나데 한 소절 꿈꾸어지는 걸 보니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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