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우두 사람들은 봉의산 자락으로 일을 보려면 배를 타야 했다. 1930년 7월 서울~춘천 간을 잇는 신연교가 건설되고 서울과의 거리가 3일로 가까워졌지만, 강원도 영서지역을 횡단하려면 아직도 난관이 많았으니 동쪽에서 흘러드는 소양강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춘천의 교통망은 서울에서 춘천, 인제를 거쳐 간성까지 가는 경성-오리진선과 김화에서 춘천, 홍천, 횡성, 원주를 거쳐 충주까지 가는 김화-충주선 2등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1932년 7월 15일 김화-충주선에 포함되어 춘천의 남북을 잇는 소양교 기공식이 열렸다. 1년 6개월 동안 총공사비 18만1천392원, 인부 수 8만4천632명이 동원되었고, 길이 397m, 폭 6m, 높이 12m의 교량이 1933년 12월 16일 준공되었다. 당시 신문에는 ‘강원도 횡단의 요충인 소양강교 초도식 성대히 거행’, ‘인접 군민 3만여 참석’, ‘산업 교통상 공헌’ 등 요란한 성과를 자랑했다. 그러나 근대 문물의 도입은 편리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었으니 일제는 이 다리를 통해 군사적 이동과 경제적 수탈의 편리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야심을 감추기 위해 여론을 적극적으로 활용, 전시효과를 극대화했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픔만 담고 있을 것인가. 백여 년의 풍상을 헤치며 소양강을 넘나들었던 사람들의 애환과 추억을 고이 간직한 소양교에 춘천사람 누구라도 추억이 없을 것인가. 

춘천고 항일학생 결사인 ‘상록회’를 주도한 한글학자 신기철(申琦澈, 1922~2003) 선생은 춘천의 봄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내 고장의 봄은 정녕 고요히 흐르는 물굽이 타고 소양교 아래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방망이 소리에서 전해지는가, 냉이 꽃다지 깨는 고향 아가씨들의 바구니에 아지랑이 감돌고 아롱진 하늘 푸른 장막 넘어 종달새 재잘거리면 지게 진 나무꾼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이름 없는 무덤 위 할미꽃도 한 포기 두 포기 고개 갸우뚱 장단 맞추는 느꺼운(마음에 북받쳐 참거나 견뎌내기 어려운) 고향의 첫봄이여!” (《동아일보》, 1963.3.24.)

춘천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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