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아(시인) 

호수는 짙은 안개를 발설하여 슬프고 아픈 무성한 사연을 너그럽게 용해할 줄 안다. 그리고 품었던 상처들이 회복하면 다시 힘을 내어 날아갈 수 있도록 댐의 통로를 활짝 열어놓는다. 환경의 모순에도 그저 저는 친밀하게 손을 내밀어 제 고통으로 환부를 감싸 안아 우리 삶을 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호수도시 춘천은 문학적으로 축복받은 천혜의 도시다. 어느 한 도시가 문화예술에 있어 이렇듯 애정과 열정으로 주목받는 곳이 또 있으랴. 20년째 살고 있는 내게도 춘천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안식처이다. 

 최지하 시인은 춘천을 ‘춘천처럼’이라고 했다. ‘처럼’은 어떤 식이나 방법을 나타내는 뜻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녀에게 춘천은 삶의 지표 같은 곳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시는 2014년 《시산맥》 여름호에 <안개와 춘천처럼>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2020년 발간한 시집 《오렌지 나무를 해답으로 칠게요》에서 <춘천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춘천처럼

슬픔은 대부분 후생성이다 불가능의 저편에서 태어나는 모의 같은 그것들 맨 처음이었을지 모를 입맞춤을 무사히 치르고 온 다음날 유리창에 피었던 춘천처럼 나를 인력引力하던 지루한 말들이 종이비행기를 접던 새벽 두 시마냥 엉금엉금 지나갔다

 춘천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안개처럼 두껍게 발설해도 좋았다 표정을 내다버릴 때도 춘천을 이용하라고 일러주고 싶었지만 바라보는 쪽으로 짧아져 가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시작의 지점을 기억해 내는 사실도 어쩌면 그런 일

 보살핌 없이 자랐던 이불 속의 발같이 뚜렷한 사실을 맞닥뜨려야 할 때도 춘천의 안개보다 먼저 태어난 후생이 따라와 있었다 너무 늦게 찾아온 어떤 일의 뒤에서부터 먼 주소를 향해 슬픈 비행을 시작하려는 물방울이거나 눈물의 이름이 춘천으로 불리는 동안 투명하지 않은 것을 향하여 전부를 걸어버린

 이 불투명한 저녁처럼 

 

 최지하 시인에게 춘천은 슬픔이다. 시적 화자가 안개 자욱한 뱃머리 끝에서 운명처럼 마주한 도시는 아슴아슴 슬픔으로 피어난다. 살아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불가능의 저편에서’는 얼마나 많은 모의가 태어나고 있을까? ‘맨 처음이었을지 모를 입맞춤을 무사히 치’른 화자는 아마도 사춘기를 모호한 안개와 춘천처럼 보내지는 않았을까? 그러니 그녀의 ‘슬픔은 대부분 후생성’인 것이다. 

 후생성 슬픔이란 원인과 결과에 이르는 발생 과정 중에 형성되는 슬픔이다. 그녀만의 그러한 슬픔은 ‘유리창에 피었던 춘천’이 ‘새벽 두 시마냥 엉금엉금 지나’가 ‘침묵하거나 안개처럼 두껍게 발설해도 좋’을 경험의 창조물인 것이다. 

그녀는 타자적 슬픔에게 ‘표정을 내다 버릴 때도 춘천을 이용하라고 일러주고 싶’지만 그때마다 자신조차 어쩔 수 없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시작의 지점을 기억해 내’는 사실에 도달하고 만다. 거기에는 벌써 ‘보살핌 없이 자랐던’ 그 뚜렷한 기억처럼 ‘춘천의 안개보다 먼저 태어난 후생이 따라와 있’었다.

우리는 간혹, ‘너무 늦게 찾아온 어떤 일의 뒤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만약 그 순간과 다시 마주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온 패를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인도 그랬을 것이다. ‘슬픈 비행을 시작하려는 물방울이거나 눈물의 이름이 춘천으로 불리는 동안’, ‘이 불투명한 저녁’에 그때처럼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박성현 시인은 그녀의 시집 해설에서 “최지하 시인의 환상 시는 무척 매혹적이다. 대부분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시인의 환상은 자기-창출인 동시에 자기-파괴적 성격을 지니는 바, 이러한 모호하고 미묘한 흐름이 오히려 작품의 내적 긴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재무 시인은 “비극적 정서와 비애가 주를 이루는 그녀의 시편들은 내상과 외상을 앓는 세계에 대한 나름의 진단이자 처방전”이라고 평했다. 

 안쓰럽게도 어린 춘천에서의 ‘슬픔은 대부분 후생성이’였다는 최지하 시인. 그렇다면 나는 시인의 그 후생성 슬픔에게 포근한 안개이불을 턱밑까지 당겨주겠다. 그러면서 나는 그 시절 그녀의 슬픔은 꿈의 북회귀선을 지나는 지점에서 듣던 바다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토닥토닥, 상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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