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문화비평가) 

인간은 공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동시에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공간 이동을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간은 흘러간다. 공간과 시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정확히는 영원하기 위해 인간은 창조주와 같은 작업을 벌인다. 예술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건축이 그러하다. 건축은 공간에 재료로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다.

인간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에서 마지막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인간이 머물러 쉬고 자는 공간인 집이다. 집은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는 안식처와 음식과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의 의미를 넘어서 가족이 함께 쉬며 이야기 나누고 아이를 키우는 보금자리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초대받지 않은 이의 급작스러운 방문은 그 자체로 공포를 유발하는 좋은 영화 소재이다.

건물의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의미를 담아내려 한 영화들이 있다. 〈안도 타다오, Tadao Ando -Samurai Architect〉(2016)나 〈이타미 준의 바다, The Sea of Itami Jun〉(2019) 그리고 〈마리오 보타 : 영혼을 위한 건축, Mario Botta. The Space Beyond〉(2018)은 어떻게 시간과 정신을 건물에 담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호피족 인디언 말로 ‘균형 깨진 삶(Life Out of Balance)’라는 뜻의 〈코야니스카시, Koyaanisqatsi〉(1982)와 〈라이프 인 어 데이, Life In A Day〉(2011), 〈콜하스 하우스라이프, Koolhaas Houselif〉(2008) 등의 영화는 위대한 건축물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일상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관찰한 기록물이다. 

집은 필연적으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집의 이미지는 늘 두려움이다. 빈집을 소재로 무수한 공포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완성되지 않은 건축물이나 폐가는 범죄 영화의 배경이 된다. 집의 의미가 단순히 건축물이 아니란 걸 증명하는 셈이다. 집이 살아있으려면 그 안에 누군가가 머물러 살아가야 한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동명의 두 영화를 주목한다. 〈우리집, Home Sweet Home〉(2016)과 〈우리집, The House of Us〉(2019)이라는 우리 영화이다. 앞의 영화는 임다슬 감독이 만든 영화로 불이 난 아빠의 집을 약혼자와 함께 찾아간 딸의 이야기이고, 뒤의 작품은 윤가은 감독이 세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불안한 자신들의 집 이야기를 펼치는 영화이다. 

같은 맥락에서 박제범 감독의 〈집 이야기, I Am Home〉(2019)을 살피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주 캐릭터가 열쇠업을 하는 아버지와 도시의 셋집을 전전하는 딸로 설정된 것이 흥미롭다. 철저하게 문을 잠그고 출근하는 일을 반복하는 딸의 모습과 늘 잠겨있는 남의 집 현관문을 열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대비된다. 영화는 식구가 곧 집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들 집 관련 영화는 빛과 그림자, 바다와 소리, 하늘과 영혼에 관해 깊은 묵상을 하게 한다. 그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가시화해주는 건축예술가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들이 창조한 구조물은 진정 나의 공간이 어디며 나의 시간의 흔적은 무엇이며, 내가 매만지는 물질의 피부가 무엇인지를 꾸준히 되묻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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