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영 (시인)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말을 기억한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반대하지만 그 사상 때문에 탄압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소위 프랑스의 똘레랑스(tolerance)를 이야기할 때면 흔하게 식자연하는 누구든 거론하는 너무나 유명한 말이다. 타자를 인정하는 것.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18세기 유럽 계몽사상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2천500년 전 중국의 사상가 공자의 말을 기억한다. 《논어(論語)》 <자로편(子路篇)>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군자는 다름을 인정하지만 함께할 줄 알고, 소인은 같음을 강요하며 끼리끼리 놀 뿐 함께할 줄 모른다. 뭐 이 정도로 해석하면 뜻은 통할 것인데, 그렇다면 화이부동이야말로 똘레랑스가 아닐까. 사람들은 똘레랑스를 흔히 관용이라 해석하지만 오히려 그 뜻에 가장 가까운 번역은 공자의 저 화이부동이 아닐까 싶다.

화이부동을 얘기하면서 신영복 선생을 빼놓을 수는 없겠다. “세상에 남이란 없습니다[天下無人]. 네 이웃 보기를 네 몸 같이 하라[視人若其身]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근대사는 타자화의 역사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을 타자화하고 자연을 대상화해온 역사였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말씀을 또렷이 기억한다. 세계는 여전히 동이불화(同而不和)로 치닫고 있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다름이란 것이 기실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니 나와 당신, 가까운 곳부터 화이부동(和而不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관어해자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 내가 늘 가까이 두고 새기는 맹자의 말씀이다. 해석은 다양하고 의견도 분분하겠지만 대략 신영복 선생의 해석처럼 “깨달음이 크면 사소함도 업신여기지 않는다” 정도로 풀이하면 되겠다. 작은 앎을 내세워, 작은 지혜를 내세워 다툼이 많은 요즘이다. 인풋보다 아웃풋이 많은 과잉의 시대이다. 요즘 같은 때 생각해볼 일이 아닌가 싶다.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기는 하지만, 맹자의 “관어해자난위수”를 변용한 당나라 시인 원진(元稹)의 시 <이사5수(離思五首)>는 잠깐 소개해야 할 듯싶다. <이사5수>는 원진이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아내 위총(韋叢)을 애도하며 쓴 시인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넓은 바다를 건너면 다른 물은 물로 보기 어렵고, 무산을 지나면 다른 구름은 구름도 아니라네(曾經滄海難爲水 除卻巫山不是雲).” 청나라 때 화가 심복이 자서전 《부생육기(浮生六記)》에서도 인용하고 있기도 한 구절인데, “증경창해난위수(曾經滄海難爲水)”가 바로 맹자의 “관어해자난위수”를 변용한 것이다. 맹자의 말씀을 원진이 “구관이 명관”이란 정도의 뜻으로 변용하여 옛 정인에 대한 애틋함을 기린 것이겠다.

다산 정약용은 화이부동을 논하면서 화(和)를 다양한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으로, 동(同)을 한 가지 재료로 만든 맛없는 음식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다양함이 곧 ‘아름다움’이며, 통일과 획일은 오히려 ‘추악함’이다”라는 뜻이겠다. 달리, 신영복 선생은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공존과 평화의 원리인데 반해, 동(同)은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라 역설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온통 동(同)의 아수라장 같다. 우리 삶이 인간의 삶이 동(同)의 추악한 굴레와 사슬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삶이 화(和)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코로나바이러스조차도 화(和)의 관점에서 보면 함께할 방도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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