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침략에 맞선 춘천 의병장 습재 이소응 선생
독립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지만 모르는 사람 많아

춘천은 여느 지역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이 많다.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된 지역이자 한국전쟁의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기고자 춘천의 충신 습재 이소응 의병장을 소개한다.

(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 이창연 회원은 “춘천에서 의암 유인석 의병장의 사상과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의암이 강조되다보니 다른 위인들이 다소 묻히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 특히 습재 이소응 의병장의 공적에 대해서 춘천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현재 강촌에 있는 이소응 의병장 생가 터는 완전히 방치돼 있다. 시가 나서서 표지석이라도 세웠으면 한다”고 안타까워 했다.

강촌에 위치한 습재 이소응 의병장의 생가 터.

◇ 습재 이소응 의병장의 삶

이소응은 1852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했다. 호는 습재이며, 학식과 덕망이 높아 추앙을 받았다.

호시탐탐 조선침략을 도모하던 일제가 1895년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전국의 유생들이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춘천에서도 1896년 1월 20일 유중락, 이만응을 중심으로 한 의병 1천여 명이 춘천부에 운집하여 이소응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소응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함께 의거하여 적들을 토벌할 것을 호소했고 많은 호응을 얻었다. 초기에는 춘천부사 겸 선유사로 처음 부임하는 친일관료 조인승을 처형하는 등 크게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무기가 부족한데다 조직과 훈련이 허술하였던 의병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관군에 밀리게 됐다. 그러다 가평의 앞산인 벌업산 패전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벌업산 전투를 앞두고 비가 많이 내려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 패인이었다.

이소응은 부득이 제천의 유인석 의진으로 들어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유인석 의진이 패퇴해 서 간도로 망명할 때도 동행했다. 이후 40여 년간 구국항쟁을 하다가 민족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30년 3월 25일 이역만리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춘천 남산면 방곡리 남산도서관 정원에 이소응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애국애족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공적비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공적비에는 이소응의 약전과 이소응이 쓴 문장, 이소응이 지은 한시가 새겨져 있다.

주강희 인턴기자,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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