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교과서에 나와서 우리에게는 가훈처럼 익숙한 게 있으니 그것은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다작(多作)이다. 글을 잘 지으려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라!’라는 금과옥조인데 이는 송나라 때 문장 마스터 구양수의 말이다. 실제로 구양수는 요즘 부총리에 해당하는 벼슬에 올랐고 신당서, 신오대사 등의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시(詩)와 사(司), 문장에 모든 능한 당대 문단의 영수였으며 주역에 밝았고 금석학에도 정통했다. 

어릴 적 구양수는 부친이 일찍 죽어 가난했다.(예전에는 대부분의 위인들이 가난했다. 반면 지금 위인들을 길러내는 시스템은 어찌 바뀌었는가.) 학비가 없어서 선생님한테 배울 수 없어서 어머니 정씨가 갈대를 꺽어서 땅에 글씨를 쓰게 하여 화적교자(畵荻敎子)라는 말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십대 중반 첫 발령지인 낙양에서 글로는 누구에게도 질줄 몰랐던 그가 보기 좋게 한방 얻어맞고는 다시 가르침을 받는 얘기는 현재 들어도 감동이다.

구양수

기실 당송팔대가도 당의 한유와 유종원을 뺀 나머지 소순, 증공, 왕안석, 소식, 소철이 모두 이 구양수의 제자이거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하자면 엄청난 문재의 본류였다. 높은 벼슬을 하면서도 사리사욕이 없었으며 엄정했던 원조 선비였던 그의 사(詞)엔 이별의 아픔과 남녀의 정, 인생의 회한이 잘 나타나 있다. 잠시 그의 대표적인 사 답사행(踏莎行)을 감상해보자.

“候舘梅殘 溪橋柳細 草薰風暖搖征轡 / 객사에 매화 시들 때 시냇가 버들은 새싹이 돋더라. 따스한 바람 풀향기 님은 말을 타고 떠나네. /離愁漸遠漸無窮 迢迢不斷如春水 /길이 멀수록 수심 따라서 깊어 가물가물 강물처럼 흘러간다네. /寸寸柔腸 盈盈粉淚 樓高莫近危蘭倚 /애간장이 녹고 눈물은 가득차니 높은 누대 난간에 기댈 것도 없이 /平蕪盡處是春山 行人更在春山外 /풀밭이 아득한 곳엔 산인데 님은 벌써 그 산도 벗어났다네.”

흡사 아녀자의 글로 오인 받을 정도로 애틋한 정조다. 이러니 조선시대 사대부에게는 송나라의 사(詞)가 배척되었다. 그렇지만 낭만과 문흥이 주류였던 송나라 시대의 찬연한 문장은 아직도 밤하늘에 빛이 난다. 천년도 지난 시간이 지운 흔적이라 그 인격과 문장의 성취를 이루기 위한 피나는 노력은 볼 길이 없지만 어찌 이것이 잠깐의 요행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빙동삼척비일일지한 (氷凍三尺非一日之寒)’이라, 어찌 삼척이나 되는 고드름이 하루의 추위로 이루어졌을 것인가. 그저 노력할 뿐이다.

최삼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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