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집' 이현숙 대표

어머니 손맛이 떠오르는 음식, 손님의 마음을 세심하게 살피는 서비스, 사람 냄새나는 스토리. 각 지역의 손꼽히는 맛 집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다. 
도청 근처에 자리한 ‘강릉집’은 맛집의 세 가지 미덕을 두루 갖춘 백반집이다. 장사도 잘되고 SNS에서도 꽤 알려진 곳이다. 그러니 이곳 주인은 마냥 행복하겠다는 선입견이 들면서, 또 한편으론 가게 이름에서 풍기는 무언가 내밀한 사연이 궁금증을 더했다. ‘강릉집’ 이현숙 사장(53세)을 만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희망을 들어보았다. 

‘강릉집’ 이현숙 사장(53세)이 긴 이야기를 마치고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릉집’ 이현숙 사장(53세)이 긴 이야기를 마치고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춘천 도심 골목에 자리한 가게 이름이 ‘강릉집’이라니,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창업하신 어머니가 강릉사람입니다. ‘강릉집’으로 문을 열고 장사를 해왔고 지금은 비록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강릉집’인 거죠. 하지만 저는 화천 사내면 사창리에서 태어났어요. 손님들이 가끔 강릉 사람도 아닌데 왜 ‘강릉집’이냐고 물어보시는데 지금 사용하는 그릇부터 모든 물건들이 전부 어머니와 함께 해온 것이기에 ‘강릉집’입니다.

아무 연고도 없던 춘천에 자리 잡은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요.

1990년도에 시작했으니 30년이 되어가네요. 그전에는 화천에서 살았었는데,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저는 5년 동안 보육원 생활을 했어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얘기지만, 그때는 이혼하면 남자가 재산을 다 챙기고, 여자를 내쫓아도 뭐라 하지도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홀몸에 애 딸린 여자는 셋방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홀로 밥벌이하는 동안 저를 보육원에 맡겼던 거죠.

그러다 15살쯤에 보육원을 나와서 어머니를 따라 춘천에 왔고, 둘이 같이 일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도청체육대회나 막국수 축제 같은 큰 행사에 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어요. 그렇게 고생하다 이 가게를 차리게 된 거죠. 저도 학교 다니면서 어머니를 도왔어요. 열심히 살다보니 가정도 일구게 됐고, 한 10년 전부터 제가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계신 거 같아요. ‘강릉집’이 곧 어머니인 셈이죠.

‘강릉집’ 벽에는 수많은 사연이 걸려있다.

식당 벽면을 가득 메운 글과 사진이 인상 깊은데, 기억에 남는 일화를 들려주세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랬던 건 아니고 제가 가게를 운영하면서부터 사진도 걸게 되고 글도 써서 붙였어요.

저기 강부자 선생과 찍은 사진이 이 가게의 첫 사진인데 사연이 있네요. 오래전 어떤 국회의원 보좌관이 대구 맑은탕을 먹고는 맛있다고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어요. 그때는 블로그가 성행하지도 않던 시절이었죠. 한 참 후 어느 날 한 남자가 탤런트 강부자 선생 모시고 갈테니 예약 좀 하자고 전화를 해왔어요. 처음엔 농담인줄 알았죠. 그런데 진짜 오셨어요.

알고 보니 강부자 선생이 공연하러 춘천에 오셔서 맑은탕 잘하는 곳을 알아보던 중에 제작진이 보좌관의 포스트를 발견하고 모시고 왔던 거였어요.

그 만남이 제 인생을 바꿔 놓았죠. 엄마가 돌아가신 후 손님도 줄고 장사가 예전 같지 않았는데 강 선생님이 맑은탕을 아주 맛있게 드시는 걸 보고는 “저 분과 사진을 찍어서 가게에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탁을 드렸더니 일요일에 나와서 밥을 해주면 사진을 찍어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요일 날 나가서 밥을 해드렸죠. 도루묵찌개 끓이고 묵은 지랑 밑반찬 몇 개해서 차려 드렸죠. 그렇게 해서 걸린 사진이 저 사진입니다. 이 가게의 첫 번째 사진이죠.

다른 사진들과 글 모두 소소한 사연들이 있어요. 제가 쓴 글도 있고, 딸아이 물건도 있고. 손님들도 좋아하고 특히 젊은이들은 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며 더 좋아해요.

‘강릉집’의 기본정식이다. 하지만 대구 맑은탕이 더 유명하다.

인상 깊은 글귀를 써서 벽에 붙이셨는데 일종의 경영철학인가요?

항상 이런 생각을 해요. “우리 집 반찬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잘생긴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이나 좋아하는 것은 똑같다. 겉모습은 달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성과 입맛은 다 똑같다” 제가 써 놓은 글 모두 저의 경험과 진심이 담긴 겁니다. 다행히 어르신들이나 젊은이들 모두 공감해주세요. 

세상에 고민과 사연 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항상 웃고 밝게 인사하니까 그저 행복하기만 한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식당 운영하다 보면 힘들고 지칠 때도 많죠. 그때마다 글 쓰면서 마음 다잡고 일합니다. 덕분에 이런 인터뷰도 하고 행복한 일도 생기는 거죠. 

사장님에게 어머니와 강릉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머니… 어머니는 감사한 분입니다. 말로 다 못하죠. 어렸을 때는 어머니 밑에서 식당 일만 하고 살아왔으니 마음 한구석에서 원망도 많았어요. 매일 돈 없다고 하시니까 친구들은 나이키, 아식스 같은 유명브랜드를 신고 입고, 주산학원 같은 데도 다니는데 왜 나만 그런 걸 못하지 하며 원망한거죠. 

이제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어머니한테 감사한 마음만 들어요. 그때 그 고생을 안 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겁니다. 물론 어머니가 제게 다른 것을 가르쳐주셨다면 인생이 달라졌겠지만 식당 일을 했던 게 더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먹고사는 원동력이 되었으니까요. 덕분에 지금 가정을 이끌어 가고 있잖아요. 지금도 형편이 썩 좋은 건 아니에요. 지난해 남편이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었거든요. “어서 오세요!” 그게 제 삶의 무게에요. 삶이 무겁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저는 더 힘차게 손님들에게 외치죠.

그래서 ‘강릉집’은 살아가는 의미이고 가족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입니다. 가끔씩 너무 힘이 들면 편하게 사는 사람과 비교하면서 “새벽부터 뭐하는 건가”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행복? 멀리 있지 않다 감사하고 살자” 면서 바로 마음 다 잡아요. 언젠가 철학원 하시는 할아버지가 앞날이 궁금하다는 저에게 해준 말씀이 있어요 “우리의 미래는 오늘이라고 보면 돼.” 그 말이 맞아요.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행복하게 보내야죠. 힘든 일이 있어도 좋은 생각 하면서 이겨내는 거죠.

요선동 골목에 위치한 ‘강릉집’은 외관부터 시선을 잡아끈다. 

메뉴가 많고 밑반찬도 다양해서 골라 먹는 재미가 있어요. 젊은 손님들도 많이 보이는데, 운영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나요?

어머니가 장사하시던 것 그대로 물려받아서 하고 있죠. 다만 계란 프라이나 햄 같은 밑반찬을 더하고 백반에 쌈과 고기를 더 한 건 장사가 잘 안됐을 때 변화를 준겁니다.

좋은 변화였는지 젊은이들도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손님들이 더 먹고 싶어 하는 반찬 있으면 달라는 대로 드려요. 젊은 친구들이 그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부모 마음이죠. 

작년에 오셨던 한 군인 손님이 기억에 남아요. 제 아들 나이쯤 되어 보여서 반찬도 더 챙겨주고 햄도 더 구워주고 했는데 그 친구가 다시 돌아와서는 박카스를 건네주면서 “저희 어머니도 이대 앞에서 떡볶이 장사하세요” 하는 거예요. 아마 본인 어머니도 고생하시는데 우리를 보니까 어머니가 생각났었나 봐요. 남 일 같지 않았던 거죠. 저는 그게 정말 고마워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최신유행? 그런 거보다 정성껏 베푸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강릉집’의 미래는 어떻게 그리고 있나요? 

이제는 저에게 위로가 되는 이 가게와 손님들을 건강하게 오래오래 보는 거예요. 함께 일하는 분들도 어머니시절부터 있어준 분들이에요. 가족이죠. 

다만 이 근처가 재개발 된다는 말이 있어서 변함없이 찾아와 주시는 손님들이 걱정이죠. 이 가게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혹시라도 이사를 가게 되면 어쩌나 그게 걱정입니다.

어떻게 됐든 ‘강릉집’은 앞으로도 계속 ‘강릉집’일 겁니다.

박민정 대학생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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