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그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을 가보고, 미래를 보려면 도서관에 가보고, 현재를 보려면 시장에 가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코로나 블루가 내게도 찾아왔는지 괜히 우울하고 작은 일에도 화가 나고 답답하다. 마침 영화관에서 <메탈리카&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를 상영 한다고 해서 혼자 찾아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영화관의 공간이 모자랄 정도의 폭발력 있는 사운드. 영화 속의 관중들은 그 큰 홀을 가득 메운 채 마스크도 없이 열광하고 또 열광하며 메탈 음악 속에 완전 푹 빠져있었다. 코로나의 여파로 극장 안의 관객은 오직 나 혼자였기에 나도 소리 지르고 환호하며, 그들과 한 몸으로 음악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세 시간 동안 진이 빠지도록 함께 즐겼다. 극장을 빠져나오며 썰렁한 복도에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현실이 영화 속 열광의 도가니와 대비 되면서 왜 그리 슬프던지. 문을 닫아건 상점들로 불이 꺼져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 나오며 그 나라의 현재를 보려면 시장에 가보라던 말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 속눈썹이 긴 낙타들의 행렬. 그리고 뱀을 파는 뱀 장수들과 추장의 딸들이 종자들과 함께 거니는 정경도 있었던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떠들고, 소매치기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정겨운 시장의 풍경을 그림 그리듯 잘 묘사한 음악을 그곳에 풀어두고 싶었다.

영국의 통속적인 관현악곡 작곡가로 이름을 떨쳤던 케텔비(Albert William Ketelbey) 의 <페르시아의 시장에서>. 무대는 분명 중동의 시장인데 선율은 신비한 동양적인 정서로 만들어 신비로운 이국적 색채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이 음악은 가본 적도 없는 나라 페르시아를 가보고 싶게 만들었던 음악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느낌의 음악. 알록달록한 비단옷들과 길가에 늘어선 과일 상점들, 그리고 터번을 쓴 수염 난 남자들과 코끝이 뾰족한 신발을 신은 젊은 재치꾼들의 허세가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흥겹고 왁자한 음악. 우리들의 시장의 모습도 그랬고, 마을을 대표하는 축제 기간의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인데. 지금은 무언가 조용하고 깊은 물 밑에 가라앉은 느낌으로 시간 속에 갇혀있는 듯하다. 

하지만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보면 아테네 역병, 흑사병, 천연두, 콜레라, 에이즈, 스페인독감, 사스 등 무서운 전염병을 겪었으면서 또 그것들로 인해 의학, 제약기술이 발달하고 나름 잘 대처하며 살아냈으니 코로나라는 이 상황 또한 새로운 신약 개발로 이겨내는 그때가 반드시 도래하리라고 본다. 

그런데 이제는 기고만장하게, 이겨냈으니 계속 이겨 낼 거라 믿으며 지구를 자꾸만 훼손하고 못살게 구는 일은 좀 자제하며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코로나를 지나며 일회용기의 사용급증, 비닐장갑, 마스크쓰레기등이 또한 심히 염려스럽다. 음악 속 저 페르시아의 시장처럼 문명스럽지 않은, 웬만큼은 불편하고 적당히 즐겁고, 자연과 동화되어 풋풋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다시 일상이 시작됐으면 참 좋겠다.

음악을 마술사처럼 만들어내는 지휘자 앙드레 류가 지휘하는 <페르시아의 시장에서>를 들어보면 어떨까. 그의 음악은 견고하지는 않지만 행복해지는 주술 같다. 언제나 화려하고 멋진 복장의 연주자들로 무대가 화려하고, 바이올린을 들고 유쾌하고 익살맞게 지휘하는 지휘자. 정신 차려보면 음악이 그리 탄탄해 보이지는 않지만 어떠랴! 객석의 표정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운걸. 음악의 힘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세상에 만고의 진리는 없다. 힘들 때 힘이 되어주는 게 곧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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