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 동파(東坡)인 송나라의 대문장가 소식(蘇軾, 1036~1101)은 부친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로 불린다. 자식이 부모보다 나아야 부모의 은혜를 갚고, 제자가 스승보다 나아야 스승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후세 사람들이 알아주기는 소동파라지만, 당송팔대가에 삼부자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으니 학문과 글에 어찌 우열을 논한단 말인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과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이들 형제에서 따온 것이라니, 고려인의 그들에 대한 사랑도 엿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160권)를 펴내, 당송팔대가 8인을 선정한 편집자라 할 수 있는 명나라 학자 모곤(茅坤)의 소철에 대한 평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는 글의 날카로운 맛은 부친 소순에 못 미치고, 호방한 기세는 형 소식에 한 수 뒤지나, 글의 담박함은 서한(西漢)이래 특별한 경지이다.” 

왼쪽부터 소순, 소식, 소철의 인물도

부친상을 치르는 3년 동안 조정에 큰 변화가 생겨 왕안석의 신법이 추진되자 폐단의 상소를 올렸다. 이후 소식은 변법을 주장하는 신당과 수구를 주장하는 구당 모두에 적으로 몰린다. 그 후 여러 차례 모함으로 유배지 혜주(惠州)에서 척박한 땅 해남(海南)까지 더 멀리 귀양을 가게 되는데, 그의 나이 이미 60이 넘은 때였다. “늙어서 황무지에 던져지니 다시 살아 돌아가길 바랄 수 없네(垂老投荒 無復生還之望)”라는 절망이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7년이 지나서 한 장의 사면장을 받아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친구가 대신 빌린 방에서 세상의 연을 놓아버리니 조야가 통탄하고, 많은 태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절에 가서 추모하였다고 한다.

소식은 사(詞) 발전에 있어 내용을 확장 시키고 경계를 끌어올리는 등 예술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이뤘지만, 현존하는 작품에서는 수적으로 사보다 시가 더 많다. 황정견은 소식의 시를 “초나라와 같이 웅대하여, 오호와 삼강을 다 삼키고 있다(公如大國楚, 呑五湖三江)”라 평가했다. 인구에 회자되는 걸작이 많지만, 그 중에 그의 대표 서정 산문 <적벽부>가 감정과 문장이 공명하는 압권이다. 후세 사람들의 “소식의 <적벽부> 두 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적벽이 황주에 있겠는가(不是當前兩篇賦, 爲何赤壁在黃州)”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 짧은 글로는 소동파 한 사람의 그 수많은 작품도 언급조차 못하고 지나가니, 나머지 두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강사 남궁현 선생의 말대로 인터넷에 다 나와 있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랑한 느낌을 원하시면 목요일 저녁 월정사문화원 강연을 본방사수 하시라.  

김진석(후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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