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王安石1069~1076)은 문필가이지만, 정치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인종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 보이듯 정치적 주장을 함에 주저함이 없었다. 변법 개혁을 담은 1만 글자의 이 글은 그래서 ‘만언서(萬言書)’라고 불리는데, 실제 정책에는 반영되지 못했지만, 그의 정치적 재능을 엿볼 수 있고, 훗날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을 올린 후 얼마 안 되어 신종의 지지를 받아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당의 기득권에 밀려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부침을 거듭했는데, 신법의 시행 또한 중지되기를 반복하다 원풍8년(1085) 재상이 된 사마광에 의해 신법은 완전히 폐지되어 실패한 개혁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울분에 병을 얻은 그는 그 다음해 66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 

완안석 인물도

문장은 사회와 정치를 위해 써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는 그였기에, 그의 산문은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고, 분석하여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글이 많았다. 왕안석은 타인의 문장을 재해석하고,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재해석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글이 ‘맹상군전을 읽고(讀孟嘗君傳)’이다. 역사에는 맹상군이 인재를 키우는데 뛰어 났으며, 많은 인재를 끌어들였다고 했지만 왕안석은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았다. 만언서와 달리 100여 자가 채 안 되는 글이지만, 첨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치밀한 논리를 드러낸다. 

“세상은 모두 맹상군이 어진 선비를 얻은데 능하였고, 어진 선비들이 그에게 귀의하였고, 그들의 힘에 의지해 호랑이 표범 같은 진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아! 맹상군은 단지 무릇 닭 울음소리나 개짓는 소리를 잘 내면서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鷄鳴狗盜)의 우리머리일 뿐인데, 어찌 어진 선비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략) 도둑 무리들이 그의 문하를 드나들었던 것이 바로 어진 선비들이 그에게 가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이런 이치가 어찌 옛날의 일이기만 하겠는가? 어떤 사람을 인재로 쓸 것인가는 그래서 중요하다. 능력과 인품을 고루 갖춘 사람 찾기가 어렵다고 대충 가져다 쓸 일이 아니다. 그 자리가 책임감 있는 자리라면 더 그렇다. 맹상군의 예처럼 그런 무리들이 득실대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 울타리에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나마 있던 어진 선비들이 떠날지도 모르겠다. 왕안석 자신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 역시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의 개혁 실패가 여혜경을 중용한 것을 비롯해 사람을 잘못 쓴 것으로 평가되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삶의 지혜라는 강연 제목처럼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다면 현실에 되새겨 볼 일이다.  

김진석(후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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