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 인물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남궁현 선생의 강의는 이번 주 백거이, 다음 주 이상은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실 이 두 사람은 강연 제목과는 달리 당송팔대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백(이태백)과 두보가 아닌 이들이 선정되었을까? 강연에서 답을 찾을 일이다.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자가 낙천(樂天)이라 백낙천(白樂天)이라고 불리는데, 당나라 시의 시대 구분을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으로 했을 때, 중당의 시인이다. 같은 시기 한유와 함께, 성당기의 이백과 두보를 묶어 ‘이두한백(李杜韓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당의 백거이는 원진(元稹)과 더불어 신악부(新樂府)운동을 전개했는데, ‘문장은 시대에 맞도록 지어야 하고, 시나 노래는 현실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文章合爲時而作 歌詩合爲事而作).’고 주장했다. 

어려서부터 풍부한 재능과 총기를 지닌 그는 17, 18세 쯤에 장안에 들어가 당시 유명 시인이던 고황(顧況)을 찾아가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이란 시문을 보였는데, 이를 본 고황이 거이(居易)라는 이름에 빗대어 ‘장안은 쌀값도 비싼데, 살기 쉽지 않겠구나(長安米貴 大不).’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곧바로 ‘들불에 다 타지 않고, 봄바람부니 다시 돌아오네(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라는 싯구를 내자 고황이 다시 보고는 바로 고쳐서 ‘재능이 이 정도면 살기 어렵지 않을 것이네(有才如比 居易不難).’라고 높이 평가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오늘날 백거이의 시는 3800여 수 전하는데, 이는 이백과 두보를 능가하는 다작이다. 그 스스로가 풍유(諷喩), 한적(閑寂), 감상(感傷), 잡율(雜律)로 분류했는데, 사람들은 주로 감상시를 좋아했다. ‘기나긴 한의 노래(長恨歌)’와 ‘비파의 노래(琵琶行)’가 대표적이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의 끝부분은 이렇다.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선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선 연리지(連理枝)가 될지어다.
天長地久有時盡 하늘과 땅도 그 다함이 있건만
此恨綿綿無絶期 슬픈 사랑의 한(恨)은 면면히 이어져 사라지지 않는구나.

이 아름다운 절창은 사랑에 눈물 흘리는 모든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작품으로 남게 됐다.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와 나라시대 일본에서도 그의 작품에 대한 인기가 드높아 그 시대에도 신편을 손꼽아 기다리고 부리나케 베꼈다는 사실이 허언이 아닌 듯하다. 1천자로 한정된 원고에 어찌 그의 삶과 수많은 시를 소개할 수 있으리오. 그야말로 필설로 다 못하겠노라. 

김진석(후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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