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광복 전까지 남한지역에는 99개의 댐이 식민지 권력에 의해 건설됐다. 남한지역은 식량 기지화 시책의 주요 지역으로 미곡 증산을 위해 관개용 댐이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1938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전쟁물자(철, 특수강 등) 생산을 위해 많은 전력이 요구됐고 특히 북한강수계에 청평댐(높이 31m, 중력식 콘크리트 댐, 1944년), 화천댐(높이 86m, 중력식 콘크리트 댐, 1944년)이 건설돼 그 역할을 담당했다. 한반도에서 사용되는 전력의 대부분을 생산하던 북한지역의 수력발전소와의 관계가 광복 이후 단절되고 전력문제가 대두되자 해결방안으로 수력발전소 계획이 수립됐다. 북한강수계의 춘천댐, 의암댐, 소양강 댐이 설치 장소로 검토됐다. 그러나 건설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차관 및 개발기금 지원 등이 차일피일 미루어지면서 사업은 흐지부지됐다. 1961년 5·16 군부 쿠데타로 집권세력이 바뀌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당시 최대 건설공사인 춘천댐, 섬진강댐 건설을 간판으로 내세워 국토개발사업을 추진했다.

(위) 춘천댐 공사현장(1963, 국가기록원) 
(아래) 춘천댐 준공(1965, 국가기록원)

1961년 9월 21일 오전 9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최고회의 재경위원 박태준 준장, 한신 내무장관, 정래혁 상공장관, 장경순 농림장관, 서독, 영국, 불란서, 월남, 로마 교황사절단 등 각국 대사 등을 대동하고 기공식에 참석했다. 이 공사는 춘성군 신북면 용산리와 서면 오월리에 걸친 협곡에 댐을 구축해 화천발전소에서 방출되는 하류량을 이용, 1만8천500kW 용량의 발전기 3대로 전력을 생산한다는 목표아래 시작됐다. 한국전력개발공단(대림산업, 창설사, 현대건설, 삼부토건)이 시공을 맡고, 건설 기간 40개월, 총공사비 22억 원, 기술자 82만 명, 일반 노무자 253만 명 등 연인원 335만 명이 동원될 계획이었다. 

이로써 무인지경 산골짜기에 새로운 도시가 서기 시작했다. 술집과 숙박 시설이 간판을 내걸고 1백여 호의 건물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1평당 2백 원짜리 땅값이 2천 원까지 뛰어올랐다. 건설경기의 서막이었다. 당시 1천200명의 노동자는 주야 24시간의 철야 작업을 시행하여 물막이 공사, 기초굴착, 도로공사, 송전·전압공사, 골재 제조공사 등 10개 공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건설비 22억 원 중 노임은 1억4천만 원으로 동원 인원으로 치면 하루 평균 80원꼴이고 12시간 노동을 해도 시간당 10원씩 120원이었다. (당시 짜장면 가격은 15원) 이들은 형편없는 노임에 흩어지기 시작해 공사가 시작한 지 얼마 후에는 600여 명 정도만 남아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범법자와 병역기피자를 동원해 ‘국토개발단’이라는 명목하에 강제 노역을 시켰다.

1965년 2월 10일 오후 2시 춘천댐과 수력발전소 준공식이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공사는 선진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우리 힘으로 만든 최초의 댐과 발전소였다. 대통령은 춘천댐 공사를 한국의 전원(電源)개발 기점이라 하고 나아가 한강 유역종합개발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한편 그 이면에는 부상자 20명, 사망자 5명의 희생이 있었다. 또한 2개군(郡). 4개면(面) 20개리(里) 약 269만 평(坪)이 수몰됐고 1천246세대 5천284명이 고향을 춘천호(春川湖) 속에 남겨두고 떠나게 되었다.

춘천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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