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리듬, ‘리드미컬한 낭송을 위하여’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은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제목 ‘청포도’에서 음운론적 강세는 ‘청’에 있다. ‘청’의 음절 세기가 강하기 때문이다. 받침이 있는 폐절음에 강세가 붙는다는 어법의 원칙에 따른 것인데, 어법의 원칙도 원칙이려니와 우리가 말을 할 때 누구나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시인명 ‘이육사’는 붙여 읽어야 한다. 성과 이름에서 두 글자든 세 글자든 네 글자든 모두 붙여 읽어야 한다. 성 ‘이’는 강세 없이 장음으로 읽고, 이름 ‘육사’는 ‘육’에 강세를 넣어야 한다. 받침이 있는 음절은 무거운 음절이고, 이 무거운 음절에 강세가 붙기 때문이다.
1연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에서 의미론적 리듬의 강세(굵은 글씨)는, ‘칠월/청포도/시절’에 있다. 칠월에서 ‘칠’의 자음 [ㅊ]과 청포도에서 ‘청’의 자음 [ㅊ]이 반복되며 리듬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저 거센 소리(=경음) 경구개파찰음 [ㅊ]을 강조해 낭송해야 한다.
또한 ‘칠월’의 자음 [ㄹ], ‘시절’에서 ‘절’의 자음 [ㄹ]이 반복되며 리듬이 만들어지므로 이 부분에도 역시 의미론적 리듬의 강세를 넣어야 한다.
2연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는, 자음 [ㄹ]이 촘촘히도 박혔다. [ㄹ]의 반복으로 리듬이 생성된다. 이 음절에도 역시 의미론적 리듬의 강세를 넣어 낭송해야 한다.
2연은 또한 ‘확신’에 찬 태도에서 나오는 어조로 낭송해야 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리듬연구자인 권혁웅이 주장하기를 2연의 굵은 글씨 ‘종성 [ㄹ]의 설측음’은, 단단함·결정성·분명함·안정·확신의 어감을 실어 나른다고 했다. 혀끝을 떠받치는 단단한 느낌이 의미와 결부돼 <청포도>의 전반부를 ‘확신’으로 전환시켰다고 한다. ‘칠월’은 청포도가 익는 ‘시절’. 계절은 반드시 돌아오듯 필연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2연 1행 “이 ‘마을’의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에서 보듯 이 땅의 과거가 겹겹이 쌓여 있고, 2연 2행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에서 보듯이 미래의 희망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청포도’가 익듯 ‘청포’를 입은 반가운 손님이 돌아오는 것은 기정사실. 그는 배를 타고 (순풍에 돛을 단 듯이) 밀려서 올 것이며, 나는 “가슴을 열고” 반가이 그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권혁웅은 2연의 ‘열리고’에서 ‘리’의 [ㄹ]은 초성으로 쓰인 탄설음이고, 나머지는 모두 종성으로 쓰인 설측음으로 분석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는 다르다. ‘전설이’는 [전서리]로, 주절이는 [주저리]로, ‘알알이’는 [아라리]로, ‘들어와’는 [드러와]로 발음된다. 발음할 때는 이렇게 연음법칙에 따라 종성 [ㄹ]이 초성 [ㄹ]로 바뀐다. 따라서 설측음이 아니라, 탄설음으로 발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발음을 할 때 종성의 설측음으로 구현되는 음절은, “이 마을”의 ‘을’, “열리고”의 ‘열’의 두 가지뿐이다.
음성언어로 전환해 발음할 땐, 권혁웅의 주장처럼 설측음으로 구현되는 게 아니라, 탄설음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모두 다 선뜻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의미상 확신에 찬 태도의 어조로 낭송해야 하는 것은 백 번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