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대표적인 번화가 가운데 하나인 애막골 한쪽으로 아파트 사이 구릉에 오래된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고성이씨와 풍양조씨 모자의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고성이씨와 풍양조씨 조안평이 여말선초에 활동한 인물인 점을 고려해보면 700여 년이라는 세월을 버틴 유서 깊은 묘역이라 할 수 있다. 고성이씨는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따님으로, 풍양조씨인 조신(趙愼)에게 출가하여 조안평(趙安平)과 조개평(趙開平) 두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인 이암(李嵒)은 고려말 홍건적이 침입하자 공민왕을 안동까지 호종하기도 한 관료로, 동국의 조맹부라 불릴 정도로 글씨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남편인 조신의 둘째 형이 고려말 전횡을 일삼던 신돈을 제거하기 위한 거사를 도모하다 사전에 탄로돼 죽임을 당하고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조신은 차남인 개평을 데리고 충남 부여로, 부인인 고성이씨는 장남인 안평을 데리고 춘천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고성이씨의 부친인 이암이 춘천 청평사에 은거한 인연이 있기에 춘천을 피신처로 택한 것이다. 

애막골에 위치한 ‘고성 이씨 묘역’. 위쪽이 아들 조안평, 아래쪽이 어머니 고성이씨의 무덤이다.

고성이씨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재돼있는 인물이다. 남편과 일찍 이별하고 과부로 살면서 아들인 안평을 교육받게 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한 공로로, 강원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정려를 받았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보인다. 조선시대에 풍양조씨는 종묘에 배향된 공신만 5명이 배출될 정도로 대표적인 벌열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조안평의 직계후손들 가운데 특히 유명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널리 보급한 것으로 유명한 조엄(趙曮)과 19세기 안동김씨와 세도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조만영(趙萬永)·조인영(趙寅永) 형제 등이 모두 조안평의 후손들이다. 영조임금 때 우의정을 역임한 조재호(趙載浩)의 집이 소양로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도 보이거니와, 조만영·조인영 형제의 무덤이 모두 춘천에 조성된 점 등으로 볼 때, 춘천은 풍양조씨 가문의 대표적인 세거지라 할 수 있다. 

이 묘역은 고성이씨 묘역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고성이씨와 조안평 두 기의 무덤으로 조성돼 있다. 아들인 조안평의 무덤이 위쪽에 위치하고 모친인 고성이씨의 무덤이 아래쪽에 위치하여 일반적인 관례와 반대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위치가 반대로 돼 있는 이유에 대해 풍양조씨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아들인 조안평이 모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갑자기 아들이 사망하자 모친이 친정아버지인 이암의 허락을 받아 그 자리에 무덤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조안평의 묫자리가 원래는 이암이 묫자리로 정한 곳인데 외손자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 셈이다. 

고성이씨 묘역은 현재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부여로 피신한 남편 조신의 무덤은 물론이고 위패를 모시는 재실까지 충청남도 문화재로 별도 지정된 것에 비하면 다소 의외다. 그러나 현재 고성이씨 묘역은 풍양조씨 가문의 철저한 관리 속에 춘천의 그 어떤 문화재보다 잘 보존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만 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방치되다시피 한 유적이 한두 개가 아닌 현실을 한 번쯤은 반성해야 할 때이다.

춘천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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