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함께 하고픈 이웃 박성혁 선생님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내 방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면 선생님(박성혁, 84) 댁 소박한 마당이 보이고 언제나 변함없이 청청한 오죽이 푸른 잎을 서걱거리며 아침 인사를 하고 얼마 전까지 꽃분홍 짙은 빛으로 황홀하게 웃어주던 수국 대신 이젠 옥상 스티로폼 박스 안에서 자라고 있는 주홍의 나리꽃이 가녀린 몸짓으로 손짓을 한다. 이곳 효자동 오래된 골목으로 이사를 온 지 11년이 되었지만,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면서도 내 이웃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나. 조금 알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당돌하게 인터뷰를 해주시겠느냐고 여쭸더니, “나 같은 사람이 뭐 인터뷰할 게 있나?” 하시며 쑥스러워하시는 걸 순전히 우겨서 지난 토요일 만나 뵈었다. 

박성혁 선생님. 교사 재직시설 경험한 스카웃 정신을 살려 퇴임 후 곧바로 봉사활동을 시작해 2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하고 있다. 돌다리봉사단회장과 춘천봉사센터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나는 홍천 사람이야. 효자동에서는 40년을 살았고 올해 여든넷이지. 그런데 왜 인터뷰를 하자는 건가?” 

“그 얘기요,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냥 살아오신 이야기를 쭈욱 들려주세요.” 했더니 머쓱하게 웃으셨다.

선생님은 홍천에서 나고 자라 춘천 사범학교(지금의 춘천교육대학)를 졸업하고 첫 부임지 고성에서 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때가 1959년이었다. 그 후 원주에서 교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40여 년의 세월을 오직 선생으로서만 살아오신 것이다. 

“난 왜 내가 선생이 되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나는 참, 선생 같지 않은 선생이었거든. 처음 부임해서 보니까, 휴전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이기도 했고, 고성이란 데가 휴전 전에는 삼팔 이북에 속했었거든. 그래서 그동안 학교를 못 다니던 아이들이 있다 보니까, 나이 차가 10년밖에 안 되는 친구도 있더라구. 지금 그 친구가 일흔넷이야. 같이 늙어가고 있지. 그러다 보니까 신체검사를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기가 차~암, 그렇더라구. 그래 키 큰 녀석이랑 작은 녀석, 그리고 여학생, 이렇게 몇을 뽑아서 측정하는 법을 가르쳐서 신체검사를 하기도 했어.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만나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상할 거야, 똑같이 늙었는데 그 친구들은 아직도 깍듯하거든.” 

시나브로 지나치며 담장 위에 빨갛게 익은 몇 알 앵두를 오물거리다보면 봄날이 가고 여름이 시작된다. 눈꽃송이 같은 으아리가 오래전 첫사랑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저 마당이 언제나 변함없이 저기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은 필자의 창문에서 내려다 본 박성혁 선생님의 마당 풍경.

첫 학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은요?

“‘명자’라는 여학생이 있었어요. 지금도 일 년에 한 번 만난다는 그 친구들 중 하난데 어느 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그 여학생 어머니가 우산을 가지고 오셨어. 그런데 이 아이 태도가 좀 그래. 우산을 확 낚아채는 거야. 그래서 어, 저놈이? 하는 마음으로 불러 혼을 냈어. 그러고 나서 그 아버님이 찾아오셔서 말씀을 하시는데 친어머니가 아니고 계모라구, 그래서 아이를 다시 불러 타이르고 조금 마음을 썼지. 그러고는 나는 잊고 살았는데 언젠가 느닷없이 전화가 왔어. 서울 오실 일 있으면 꼭 한 번 뵙고 싶다고. 그래서 한 번 만났는데 남편이랑 같이 나왔더라구. 그런데 갑자기 두 내외가 큰 절을 하는 거야. 고마웠대. 그게 뭐, 고마울 일인가? 선생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그게 참 그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이 어떤 사람한테는 평생 잊지 못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후로 그 집 딸아이 혼인 때도 그 남편이 청첩을 해서 갔었는데 거기 다 모였더라구.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이.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찾아와, 아이들이. 그래서 사람은 함부로 살면 안 되는 것 같아. 인연이란 게 참 무섭고 놀라운 것이거든. 크게 해준 것도 없는데 제일 고마운 선생님이었대, 내가.” 환하게 웃으시는 선생님의 얼굴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엄격해 보이는, 그래서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모님은 언제 만나셨어요?

“내가 스물여섯, 일곱 그때 만났지. 연애는커녕 얼굴도 못 보고 결혼을 했어. 총각이다 보니까 옆에서 선배들이 자꾸 장가를 가라는 거야. 그런데 그 사람들 이야기하는 걸 가만 듣고 있자니까, 한 사람한테로 맞춰지더라구, 그게 우리 집사람이야.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 살고 어느 집안이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해줘. 그 집안이 너무 엄격해서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난 술도 못 먹는데 술 한잔 사겠다고 끌고 가서 우격다짐하듯 물었지. 알고 보니까 처제가 우리 학급 학생이더라구. 그래, 일단 집에다 말을 했어, 그 처자한테 장가를 들겠다고. 그러고는 얼굴 한 번 볼려고 찾아갔는데, 바로 그날 우리 집에서 사주단자를 보낸 거야. 그래서 혼례를 했지,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사모님은 어떤 분이세요?

“늘 미안한 사람,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 지금까지 우리는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어. 부부가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나는 내 성격을 잘 알아. 못 참고, 맘대로고,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성격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 집사람이 뭐라 그러면 무조건 ‘그래, 알았어.’ 그래. 틀리지 않으니까. 내가 칠 남매 중 가운데야. 위로 누님이 넷이고, 밑으로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가 또 있어. 우리 어머니가 워낙 칼칼하신 분이라, 우리 집사람 층층시하 시집살이 엄청나게 했지. 그걸 아니까, 더 나는 그 사람 말에는 무조건이지.”

혹시 선생님, 사모님 휴대폰에 선생님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아세요?(나는 얼마 전에 살짝 들여다봐서 알고 있었다.)

“모르는데..., 나는 그 사람을 천사라고 저장했는데, 그 사람은 나를 뭐라고 저장했는지 몰라.” “사모님은 선생님을 ’애인‘이라고 저장하시고 계세요.” “아, 그래? 그렇대?” 하면서 묘하게 웃으셨다.

사모님을 휴대폰에 '천사'라고 저장해놓으신 박성혁 선생님

퇴직하시고서는 어떠셨어요?

“퇴직하고 곧바로 봉사활동을 시작했어. 내가 보이스카웃 활동을 했었거든. 그 모토가 ’일일 일선‘이야. 평생 그렇게 살려고 애쓰며 살았지. 그리고 또 바로 숲해설가 활동도 시작했고. 나이가 너무 많아 안 써주면 어쩌나 했는데, 써주더라고. 그게 벌써 20년이 됐네. 도시락 봉사하면서 참 행복해. 봉사는 남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건지도 몰라. 내가 뭐라고 반가워하시고 고맙다고 하시는 걸 볼 때는 눈물겹지. 한 할아버지는 강아지하고 두 식군데, 담배를 엄청 좋아하셔. 그런데 할아버지가 담배를 물면 강아지가 - 그 강아지가 다리가 하나 없어. 오토바이에 다쳐서- 재떨이를 밀어서 할아버지 앞에 갖다 놔. 그걸 보면 그래. 사람은 어딘가 정 붙일 데가 있어야 사는 것 같애.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도시락 봉사는 할 거야. 서른일곱부터 당뇨약을 먹고, 심장 수술도 하고, 고혈압까지 있어. 늙으면 약이랑 함께 사는 거지, 뭐. 이젠 어제 일도 깜빡깜빡할 때가 있고, 친구들도 하나하나 떠나고…, 정말 열심히 곧은 길로만 걸었는데도 늙으니까 그래. 허무해! 내가 숲해설가 할 때 어느 산 정상에서 둥치만 곧게 선 주목 한 그루를 만났는데,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천년 고목도 이렇게 쓰러져 눕는구나! 하물며 사람이야 말해 뭐하겠어.”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힘들잖아요? 해주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첫째는 배려지. 그건 마음을 나누는 일이거든.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배려를 받아들일 줄도 몰라. 아이들을 키울 때 엄마들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고, 사회적으로도 교육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건강. 나를 두고 볼 적에도 건강해야 봉사도 하고, 다른 여러 활동도 원활하게 되는 것이거든. 그리고 또 하나, 상대방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것. 듣는 일은 위안을 주는 일이야.”

올해 여든넷의 노 선생님 얼굴에서 나는 모범답안 같은 인생을 보았다. 그리고 당부드렸다. ‘어디 가시지 말고 우리 동네서 오래오래 함께해 주셔야 해요.’ 오래도록 이웃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니까.

“가긴 어딜 가? 끝까지 한 동네서 살아야지” 하시는 그 말씀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이경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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