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담 더 갤러리(도화길 6번길 9) 개관 1주년 초대전…30일까지

이정여 작가의 모든 작품에는 연밥(연꽃의 열매)이 등장한다. 그래서 연밥화가로 불린다. 

작품 속 초록을 잃은 연밥은 사람을 닮았다. 인생의 찬란한 시절을 지나 황혼을 맞이하거나,  모진 삶을 이어가는 도시의 군중들이 연상된다. 또 때로는 옹기종기 모여 별자리를 이루어 하늘에 희망을 기도한다. 

이정여 작가와 그의 연작 〈The Present〉중 일부 작품들.

연밥·원(圓)·하늘 빛 연못·별자리·모시. 이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와 오브제들로 최근 작품을 채워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화려하고 싱그러운 꽃보다는 마른풀과 시든 꽃에 더 애착이 갔어요. 꽃병에 담긴 꽃이 시들어도 버리지 않고 좀 더 두고 보았죠. 어린 마음에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가올 새 생명을 위한 준비, 돌고 도는 자연의 순환이었어요.”

하지만 연밥을 만나기 전까지 이 작가의 작품들은 생명의 절정을 뽐내는 화려한 꽃들로 가득했다. 그와 연밥의 운명적인 만남은 춘천에 자리 잡고 몇 해 지난 2002년 늦가을이었다.

“연밥은 운명처럼 다가왔어요. 2002년 늦가을에 강원사대부고 교정을 산책하다 연못을 가득 메운 시든 연밥군락을 보고 발걸음이 멈춰졌어요. 그 순간 그것들이 사람으로 보였어요. 

멀리서 보면 어깨를 마주 대고 선 인간군상을 닮았고, 가까이서 보면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서 각자 삶의 비밀을 안고 있는 개인이 연상됐어요. 탁한 연못에서 피어나 한 여름 찬란한 청춘을 보내고 늦가을 누렇게 시든 연밥. 바로 우리의 삶이지요.”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난 연밥은 2006년 개인전에서 작품으로 표현되어 오늘에 이른다.

작가는 배채법(종이의 뒷면에 색을 칠하여 은은한 느낌이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화법)을 사용해 하늘빛으로 곱게 물들인 장지(3번 겹쳐서 만든 한지) 위에 연밥을 그린다.

연에는 종자가 많이 들어있어서 옛날 사람들은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연밥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상실과 그리움을 채우고 싶은 바람이 담긴 것이다. 연밥은 이 작가에게 그런 존재이다.

연밥을 통해 모든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이 은유된다. 그러한 은유는 배채법으로 은은하게 표현된 ‘연못’, 하늘을 닮은 동그란 원형의 장지, 별자리, 모시 오브제가 더해져서 인연과 윤회로 얽힌 하나의 우주를 완성한다.

연밥은 늘 등장하지만 표현 방법은 변해왔다. 15점의 작품들은 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보여준다. 

초기에는 장지에 석채를 이용해 연밥을 그리거나 장지를 찢어 붙여서 연밥을 표현하기도 했다. 중기에는 모시를 오브제로 사용해서 풀로 붙였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천연염색을 한 모시를 바느질해서 붙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유품 중 한 땀 한 땀 정성 드레 지은 모시한복이 있었어요. 그것은 내 어머니의 흔적이자 그리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떠나간 이 땅의 엄마들을 생각나게 했어요. 삶의 희망·의지 그리고 상실과 죽음 많은 것들이 담겨있어요.”

그리움의 정서가 가득하지만 작가는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잃지 않는다. 

최근 작품들의 제목이 모두 〈The Present〉인 것에서 그런 태도가 엿보인다. “인생에서 많은 것들이 떠나갔지만 지금 이순간의 삶, 이 또한 내게 선물이라 여깁니다. 삶의 이미지로 운명처럼 다가와 나의 일부가 된 연밥은 이제 생에 대한 의지이고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있어요.” 

그는 연밥 연작 〈The Present〉를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하지만 언젠가 연밥은 환영처럼 사라지고 하늘과 우주를 닮은 잔잔한 연못만을 선보일 날을 꿈꾸고 있다.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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